행행도(行幸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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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의 행행(行幸) 행렬을 묘사한 기록화.

개설

행행은 왕이 궁궐 밖으로 행차하는 것을 이르는데, 보위를 계승한 새 왕이 선대왕의 업적을 기리고 효심을 대내외적으로 표명하기 위해 거행하거나 민심을 살피기 위해 행하는 의례였다. 왕의 행행 중 대표적인 것이 능행(陵幸)인데, 선대왕의 능침을 살피고 제사를 받드는 능행은 대외적으로 왕권 계승과 지배의 정통성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목적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궐 밖에서 백성의 실정을 볼 수 있고, 한편으로는 왕, 관료, 백성에 이르기까지 국가 의례의 계층적 질서 체제를 인식하게 하는 통치 행위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현존하는 행행도(行幸圖) 중 대부분은 능행 관련 반차도로 의궤 속에 삽입된 반차도가 대부분이다. 능행과 관련한 주요 행사는 능원의 이장과 관련한 천릉(遷陵)과 천원(遷園), 능원의 봉심이나 제사를 거행하기 위한 것으로 행행도는 이때 왕의 의장 행렬이 자세히 묘사되었다.

내용 및 특징

1. 천릉 및 천원 관련 반차도

능원에 문제가 있거나 사후 추존하면서 이장하는 천릉이나 천원 관련 의례는 흉례에 속하였기 때문에 행렬은 발인반차도에 준하여 편성되었다. 1627년(인조 5) 『원종장례도감의궤』의 반차도는 인조의 생부 정원군(定遠君)이 원종(元宗)으로 추존되면서 묘소를 흥경원(興慶園)으로 옮길 때 그린 반차도이다. 행렬의 선두에 선 방상씨가 말에 타고 있어 후대의 수레를 탄 모습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왕릉의 이장과 관련한 반차도는 1630년(인조 8) 『선조목릉천봉도감의궤』와 1673년(현종 14) 『효종영릉천릉도감의궤』 속에 포함되었다. 1630년 선조의 목릉을 건원릉 국내(局內)로 이장하는 행렬은 비교적 소략하여 수십 명이 메어야 하는 대여를 사용하지 않고 소규모의 견여만 사용하였으며, 평교자·연·홍양산만 갖추고 의장기 배설을 없앴다. 또한 금부 낭청과 주장 내시들만 시위하여 지방(紙榜)을 모신 요여를 운구하는 행렬을 묘사하였다(『인조실록』 8년 5월 4일). 1673년 건원릉 국내에 있던 효종의 영릉(寧陵)을 여주영릉(英陵) 옆으로 옮길 때의 반차도는 국장 시 발인 행렬과 같이 편성하였으며, 도자기로 구워낸 사지석(沙誌石)을 담은 요여가 추가된 점이 특징이다.

2. 능행 관련 반차도

국왕의 능행은 국가 의례 중 길례에 속하였다. 정조는 1778년(정조 2)에 병조 판서를 노부와 의장에 관한 제반 사항을 관장하는 노부사(鹵簿使)로 임명하였다(『정조실록』 2년 4월 12일). 1779년(정조 3)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던 숙위소가 폐지된 후 궐 밖과 도성 밖 행로에서 국왕의 신변 안전을 위해 반차도에 의거하여 호위를 강화하도록 하였다(『정조실록』 3년 10월 8일)(『정조실록』 5년 윤5월 8일). 이에 1780년(정조 4) 9월 2일 진종의 영릉(永陵)에 행행하면서 반차도 도식을 처음 제작하였다(『정조실록』 4년 9월 2일). 1784년(정조 8) 가을 정조가 영릉에 행차할 때 내의원이 승정원과 홍문관 중간에 위치하여야 하는데 잘못된 전례로 인해 반차가 가장 뒤로 밀려났다는 내의원의 의견을 수용하여 정조는 반차도를 바로잡도록 병조에 지시하였다(『정조실록』 8년 8월 9일). 당시 반차도는 1788년(정조 12)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수록된 금의산릉동가반차지도(今儀 山陵動駕班次之圖)를 참고할 수 있는데, 산릉이나 능원에 거둥할 때 행차를 글자 도식으로 그린 것이다.

3. 1795년 원행(園幸) 관련 반차도

1795년(정조 19)은 장헌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갑년, 즉 회갑이 되는 해이자 정순왕후가 51세가 되고, 정조가 즉위한 지 20년이 되는 해였다. 정조는 이러한 국가 경사를 기념하여 혜경궁 홍씨와 함께 생부의 원소인 현륭원(顯隆園)에 전알할 행차를 준비하였다. 정조는 1789년(정조 13) 10월 영우원 천봉 이후 매년 초에 한 차례씩 행차하였고, 그 절차를 『원행정례(園幸定例)』로 정식화하였다. 1794년(정조 18) 12월에는 을묘년 원행을 추진할 전담 부서인 정리소(整理所)를 설치하고 호조 판서심이지(沈頤之)를 정리사(整理使)로 임명하였다.

정조는 1795년 정월에 정순왕후와 혜경궁에게 가상존호를 올리고, 장헌세자에게 추상존호를 올린 후 윤2월에 현륭원을 전알하였다. 현륭원 원행은 윤2월 9일에 혜경궁을 모시고 대궐을 나서서 시흥 행궁에서 묵고, 10일에 화성 행궁에 도착, 11일에 성묘에 전배하고 지역 백성을 대상으로 문무과 시험을 치렀다. 12일에 혜경궁을 모시고 현륭원에 전알한 뒤 화성 장대에 나가 군사훈련을 점검하였다. 13일에 봉수당에서 혜경궁에게 진찬을 올리고, 14일에 신풍루에 직접 나가 백성들에게 쌀과 죽을 나눠 주고 낙남헌에서 지역 원로들을 초청하여 양로연을 베풀었다. 15일에 화성 행궁을 떠나 시흥 행궁에서 유숙하고, 윤2월 16일에 환궁할 때까지 8일 동안의 일정이었다(『정조실록』 19년 윤2월 1일). 정조는 정리소에 의궤를 편찬할 때 기존 체제를 따르기보다 화성 행행의 의의를 후세에 드러내어 증명할 수 있도록 관련 사항을 유취(類聚) 체제로 편집하고, 구리 활자를 주조하여 인쇄하게 하였다.

총 10권 8책으로 구성된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도식만 모은 권수에는 화성행궁도, 봉수당진찬도를 비롯하여 주요 행사 장면, 혜경궁이 탄 가교, 세부도 등을 묘사하고, 반차도에는 경기감사의 도가 아래 혜경궁의 가교와 어가 행렬을 총 63면에 걸쳐 묘사하였다. 반차도는 도가 행렬, 선교(船橋)의 선상군 행렬, 어가 앞의 시위군 행렬, 의장과 취타대, 어전 대기치 행렬, 혜경궁의 가교와 어가 행렬, 외빈과 서리, 근신들의 수가(隨駕) 행렬, 장용영과 배종 관원, 백관, 금군, 후상군 행렬로 구성되었다.

1795년 원행과 관련한 반차도는 규장각 소장 화성원행반차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원행반차도 도권과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를 모본으로 화첩 형식으로 제작한 『원행정리의궤도』 등이 전한다.

이는 정조가 어머니인 혜경궁을 모시고 원행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효심을 대내외에 표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18세기 국가 행사의 위용과 성업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행행도(行幸圖)를 다량 복제 반포함으로써 행차의 의의를 보다 널리 알리는 데 기여하였다(『정조실록』 20년 3월 17일).

4. 고종대 능행 관련 반차도

고종은 즉위 후 3년간 대왕대비 조씨의 수렴첨정에 이어 1873년까지 흥선대원군의 정국 주도로 인해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정책들과 국가 의례 활성화를 추진하였다. 비록 정치적 주도권은 행사하지 못하였지만, 종묘와 영희전, 경모궁 친향, 선대 왕릉 전배 및 친제를 적극 행하였다.

고종은 1864년(고종 1) 8월 철종 산릉의 친제에 이어 태조의 건원릉, 익종의 수릉, 헌종의 경릉을 방문하였고, 1866년(고종 3) 화성, 파주, 개성 등지로 능행의 범위를 넓혀가며 궁궐 밖 백성의 생활상을 살피고 군사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즉위 이후 10년간 지속된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거쳐 1873년 친정을 시작한 고종의 능행반차도는 경진행행반차도(庚辰行幸班次圖)가 대표적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경진행행반차도는 1880년(고종 17) 익종의 수릉, 헌종의 경릉 태조의 건원릉 등을 행행했던 것을 기록한 반차도로서, 오군영제가 무위영(武衛營)장어영(壯禦營)으로 개편되는 1881년 이전 상황이 행렬에 반영되었다(『고종실록』 18년 12월 26일). 평교자나 소련(小輦) 없이 공가교만 배설하였고, 선상진(先廂陣), 중앙진, 후상진(後廂陣) 등 행진하는 시위군의 편제가 새롭게 나타난다. 특히 후상진은 보군이 없이 대기치와 취타대, 금위영의 중군과 대장의 표하군(標下軍), 창검군(槍劍軍)으로 구성된 점이 주목된다.

참고문헌

  • 김문식, 「18세기 후반 정조 능행의 의의」, 『한국학보』88, 일지사, 1997.
  • 김세은, 「고종초기(1863∼1873) 능행의 의의」, 『조선의 정치와 사회』, 집문당, 2002.
  •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능행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8.
  • 제송희, 「조선시대 의례 반차도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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