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의(海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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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물 중의 하나로, 음식 재료로 사용한 홍조식물 보라털과의 해조(海藻).

개설

우리나라의 연안에 10월 무렵부터 시작하여 겨울에서 봄에 걸쳐 번식하는 홍조류의 해초이다. 바다의 암초에 이끼처럼 붙어 자라거나 양식한다. 얇게 펴서 말려 유통하는데 주로 쌈으로 먹는다. 조선시대에는 진상되어 제물로도 이용되었다. 해태(海苔), 자채(紫菜), 자태(紫苔), 청태(靑苔)라고도 한다.

원산지 및 유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등에 소속된 30여 곳 군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충청도 태안군(泰安郡), 경상도 울산군(蔚山郡)·동래현(東萊縣)·기장현(機張縣)·장기현(長鬐縣)·영일현(迎日縣)·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영덕현(盈德縣), 전라도 등 9개 군현의 토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김[海衣]을 포함하여 미역[常藿], 분곽(粉藿), 다시마[多士麻], 감태(甘苔) 등의 해조류가 공물로 진상된 기록이 있다. 공물 진상에는 백성들의 고통이 따랐다. 경상도 암행에서 백성들은 해의를 진상하는 것에 대해 매우 고통스럽게 여겼다(『선조실록』 34년 4월 1일). 백성들의 고충을 살핀 효종은 어공(御供)하는 해의 1첩 값이 목면 20필까지 간다고 하니 봉진하지 말 것을 명하였다(『효종실록』 1년 3월 23일). 정조는 삭선(朔膳)으로 바치는 물품 중에 해의, 어란(魚卵), 광어 등은 길이와 너비에 구애되어 풀로 붙이거나 침을 발라 규격에 맞춘다고 하니, 그렇게 하면 정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민폐도 적지 않을 것이므로 폐단을 바로잡도록 교서를 내렸다(『정조실록』 17년 11월 27일).

『성호사설(星湖僿說)』 「만물문(萬物門)」에는 속명 김[海衣]이란 것이 있는데, 이는 바로 바다 돌[石] 위에 돋는 이끼[苔]로 빛깔은 붉다. 그것을 따서 마치 종이처럼 조각으로 만드니, 이것이 조(組)라는 것인 듯하다고 하여 마른 김을 만들어 유통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의 문신 이만도(李晩燾)는 『향산집(響山集)』에서 산에 거처하는 중 김을 선물로 받고 감격스러웠으나 보답할 물건이 없어 참먹[眞玄] 1정(丁)을 보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언제부터 김 양식을 시작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남해안의 하동과 광양 인근에서 김이 많이 붙은 나무토막이 떠내려 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에 착안하여 양식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질 뿐이다. 조선말기에는 남해안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양식할 정도로 발전하였다. 특히 광양만 연안 도처에는 김 양식을 위한 섶이 세워져 성행하였고, 김 양식장이 사유화되어 토지처럼 매매되기도 하였다.

연원 및 용도

『도문대작(屠門大嚼)』에 해의는 남해안에서 나는데, 동해 사람들이 주먹으로 짜서 말린 것이 가장 좋다. 『경세유표(經世遺表)』에 태(苔)는 해태이다. 감곽(甘藿) 또는 감태(甘苔)라 부르기도 한다. 태에는 속명으로 해의, 방언으로는 김이라 하는 자태와 청태 등 5~6종이 있다고 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에 조선의 해의는 자채와 같은데 크다고 하였다.

진상된 김은 제찬(祭饌)으로도 쓰였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장례에서는 사옹원(司饔院)에서 올린 조석의 상식에 해의자반(海衣佐飯)이 포함되어 있다. 또 혼궁(魂宮)에 발인하기 전후의 각양 진배 물품에도 해의가 포함되어 있는데, 사포서(司圃署)에서 봉진하였다.

김은 마른 김을 쌈으로 싸서 먹거나, 양념을 한 후 말려서 자반으로 만들어 먹었다. 『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구이김 만드는 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김쌈은 김을 손으로 문질러 잡티를 없앤다. 소반 위에 펴 놓고 발갯깃으로 기름을 바르며 소금을 솔솔 뿌려 재워서 굽는다. 네모반듯하게 잘라 담고 복판에 꼬지를 찔러야 풀어지지 않는다. 흐트러지기 쉬운 김을 상에 정갈하게 담는 법까지 소개하였다. 김자반은 김을 여러 장 포개어 진장·깨소금·고춧가루·기름을 합해 적신 후 채반에 말려 반듯하게 썰어 쓰는데, 늦은 봄과 초여름에 쓰임이 있다고 하였다. 『규합총서(閨閤叢書)』에는 파래나 감태를 물에 깨끗하게 씻어 다듬고 모양을 얇고 반반하게 만들어 가위로 둥글게 혹은 반듯하게 마음대로 베어 말려 지져 쓴다고 하였다.

생활민속 관련사항

김은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에 각 도에 필요할 때 토산물을 바치게 하는 복정(卜定) 물품에 기록되어 있어 이웃한 중국과 일본으로 보내진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이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사은표전(謝恩表箋)을 배송하는데, 김 150근이 포함되어 있다(『세종실록』 12년 5월 4일). 성종대에는 명(明)으로 보내는 진헌물에 김이 포함된 것이 10차례나 되며, 그 양은 적게는 20근에서 많게는 200근에 이르렀다(『성종실록』 9년 8월 13일).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세유표(經世遺表)』
  • 『규합총서(閨閤叢書)』
  • 『도문대작(屠門大嚼)』
  • 『만기요람(萬機要覽)』
  • 『성호사설(星湖僿說)』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시의전서(是議全書)』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해동역사(海東繹史)』
  • 『향산집(響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