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궁(魂宮)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혼궁 |
한글표제 | 혼궁 |
한자표제 | 魂宮 |
상위어 | 국상(國喪), 국휼(國恤) |
하위어 | 순회궁(順懷宮) |
동의어 | 강서원(講書院), 경선당(敬善堂), 구내반원(舊內班院), 통화전(通和殿) |
관련어 | 내중배설청(內中排設廳), 세자(世子), 세자빈(世子嬪), 이안청(移安廳), 중배설청(中排設廳)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신지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혼궁(魂宮) |
왕세자나 세자빈 및 세손과 세손빈의 장례를 마친 뒤 신주를 모셔 두고 삼년상을 치른 곳.
개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 세자와 세자빈의 상(喪)을 ‘국휼(國恤)’이라 하여 나라 전체의 상례로 행하였다. 이때에 죽은 사람의 신분에 따라 구분하여 그 격식을 달리했는데, 왕과 왕비의 상은 대상(大喪), 왕세자와 세자빈의 상은 소상(小喪)이라 하였다. 또 왕비와 세자빈의 상은 각각 내상(內喪)과 소내상(小內喪)으로 따로 구분하였다. 혼궁은 왕세자와 세자빈 및 세손과 세손빈의 국상에서, 시신을 묘소에 안치한 뒤 3년여 간 신주를 모시는 곳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는 왕세자나 세자빈, 및 세손과 세손빈이 세상을 떠난 경우, 다시 말해 소상일 때는 빈소를 빈궁(殯宮)이라 하고, 시신을 안치하는 곳은 묘(墓)라 하고, 삼년상 기간 동안 신주를 모시는 곳은 혼궁이라고 불렀다. 소상에는 시호와 묘호 그리고 상례를 마친 후 신주를 모실 사당의 묘호(廟號)를 정할 뿐, 혼궁의 이름을 따로 짓지 않았다. 따라서 여러 혼궁의 사례를 나열할 때에는 시호를 붙여 구분하였다. 예를 들어 효장세자혼궁(孝章世子魂宮), 의소혼궁(懿昭魂宮), 효순혼궁(孝純魂宮) 등으로 시호를 붙여 불렀다. 대행왕과 대행왕후의 시호를 함부로 부를 수 없기에 전호(殿號)를 지어 올려 각각의 혼전명을 갖추고 시호를 부를 것을 삼간 것과 비교된다.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의 경우는 시호만 정하고 묘소를 순회묘(順懷墓)라 하고, 혼궁과 사당 모두를 순회궁(順懷宮)이라 불렀던 사례도 있다.
혼궁은 왕이나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삼년상을 설행하는 공간인 혼전(魂殿)보다는 위계가 한 단계 낮게 조성되었다. 혼궁의 중심 공간인 정전은 대개 경덕궁의 경선당(敬善堂), 창경궁의 옛 내반원, 강서원, 통화전 등이 선정되어 신주를 봉안하고 제례를 행하였다. 혼전이 주로 창덕궁의 선정전, 창경궁의 문정전, 경덕궁의 자정전 등 궁궐의 편전(便殿)에 해당하는 전각에 마련된 것과 비교해 보면, 규모가 작고 격이 낮은 건물이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전의 형태는 어칸 남쪽에 ‘정(丁)’ 자 모양으로 중배설청을 3칸 조성한 까닭에 정자각(丁字閣)과 유사하다. 정전 서북쪽에는 내중배설청을 두었으며, 동행각 혹은 서행각에 이안청을 3칸 규모로 마련하였다. 정전의 북쪽에는 방전(方甎)을 깔고 망료위(望燎位)를 설치하였다. 정전으로 들어서는 행각은 이중으로 구성되었으며, 내삼문과 외삼문으로 삼문의 형태를 갖추었다. 삼문 밖에는 안향청·전사청·재실 등 제례를 준비하는 공간들이 마련되었다.
『동궐도(東闕圖)』를 살펴보면, 그림에 묘사된 통화전은 혼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통화전 정전 어칸에 연결하여 3칸 규모의 중배설청이 ‘정(丁)’ 자 형태로 조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창경궁의 편전인 문정전은 중배설청이 7칸으로 조성되어 있어,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혼전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혼전의 경우 중배설청 7칸 외에도 내삼문 밖으로 이어지는 외중배설청과 외삼문 밖의 제물 출입 행각 등으로 긴 행각이 이어진다. 이에 비해 혼궁은 정전에 맞대어 조성된 3칸의 중배설청이 내삼문에도 이르지 못한다. 『동궐도』는 이처럼 조선후기의 혼전 및 혼궁의 모습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정전의 내부에는 간소한 가구를 배치하였다. 혼궁의 중심에는 모란이 그려진 장지로 삼면이 이루어진 당가(唐家)를 두었다. 당가 하부의 어탑(御榻)은 당주홍(唐朱紅)이 칠해진 것을 사용했으며, 어탑 위에 놓는 신좌교의(神座交倚)와 신탑(身榻), 방교의 등은 모두 흑진칠(黑眞漆)이 된 것을 썼다. 정전과 중배설청 등에 배치하는 제상(祭床)과 정전 문밖에 놓는 아가상(阿架床)도 마찬가지로 흑진칠이 된 것을 사용하였다. 어탑의 동쪽에는 도장을 놓는 인장을 배치하고, 서쪽에는 책장을 두었다. 그 아래로 서쪽에는 청개(靑蓋) 한 쌍을 놓았고, 동쪽에는 작선(雀扇) 한 쌍을 배치하였다.
여기에 비해 혼전의 경우, 당가에 오봉(五峰)이 그려진 장지를 배치하였다. 신좌교의와 신탑 및 방교의 등에는 왜주홍(倭朱紅)을 칠하였다. 또 인장 대신 왕의 어보(御寶)를 놓는 보장(寶藏)을 배치하였다.
참고문헌
- 『동궐도(東闕圖)』
- 『[순조]빈전혼전도감의궤([純祖]殯殿魂殿都監儀軌)』
- 『헌경혜빈빈궁혼궁도감의궤(獻敬惠嬪殯宮魂宮都監儀軌)』
- 『[효명세자]빈궁혼궁도감의궤([孝明世子]殯宮魂宮都監儀軌)』
- 신지혜, 「조선조 숙종대 혼전조성과 그 특징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제19권 3호, 2010.
- 윤정, 「조선시대 혼전운영에 대한 기초적 정리」, 『규장각』제28호, 2005.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