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원역(咸原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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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함경도의 도로망인 거산도에 속한 역으로, 오늘날의 함경남도 홍원군에 위치해 있었음.

개설

함원역(咸原驛)은 조선전기 세종 때 처음으로 설치되었으며, 세조 때 역로(驛路)를 41역도(驛道)-543속역(屬驛) 체제로 개편하는 과정에서 거산도(居山道)를 구성하는 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후 갑오개혁이 마무리되는 시점인 1896년(건양 1)까지 존치(存置)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함원역이 처음 설치된 것은 세종대이다. 1445년(세종 27)에 함길도 5진의 각 참(站)에 토착민을 배속하고 전지(田地)를 주어 구휼하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홍원(洪原) 지역에 도망해 들어와 사는 사람의 전지를 추려 위전(位田)으로 삼아 새로 참을 만들면서 함원참(咸原站)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함원역의 시초가 되었다(『세종실록』 27년 4월 22일). 함경도 홍원 지역에 설치되었는데, 함원역을 통과해 함관령(咸關嶺)을 넘는 도로는 홍원현의 대로(大路)였다.

조직 및 역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홍원 편에 따르면, 함원역에는 상등마 1필, 중등마 10필, 하등마 11필과, 역리(驛吏) 315명, 역노(驛奴) 155명, 역비(驛婢) 72명 등이 배속되어 있었다. 그런데 1872년(고종 9)에 간행된 『관북읍지(關北邑誌)』의 기록은 약간 다르다. 상등마 1필, 중등마 9필, 하등마 12필로 마필의 총수는 같지만, 역리 460명, 역노 25명, 역비 7명, 일수(日守) 15명이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또 복호결(復戶結) 64결(結) 50부(負)가 배속되어, 역마를 사들이거나 역을 운영하는 재원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변천

함길도의 각 역에는 찰방(察訪) 3명을 두었는데, 이를 혁파하고 역승(驛丞) 6명을 두게 되면서 관원의 수가 2배나 많아지고 소용되는 마필의 수 또한 늘어나는 등 관직의 불필요한 증가에 따른 폐단이 생겨났다. 그에 따라 1446년(세종 28)에 역승을 4명만 두도록 이 지역의 역도를 개편했는데, 그 과정에서 홍원의 함원역에서 갑산과 단천의 마곡역(麻谷驛)까지가 거산도에 속하게 되었다(『세종실록』 28년 11월 17일). 1447년(세종 29)에는 홍원현 함관령 아래에 신설한 함원참의 전지가 척박해 역리가 일을 수행하기 힘들고, 또 이미 평포참(平浦站)과 신은참(新銀站)이 있으니 더 설치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함원참을 혁파하고 그 이속(吏屬)은 덕산참과 신은참에 나누어 배속하였다(『세종실록』 29년 1월 14일). 그 뒤 세조대에 역로가 41역도-543속역 체제로 개편되고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의 역도-속역 체제로 계승되면서, 함원역은 조선후기까지 거산도에 소속된 역의 하나로 확립되었다. 함원참의 ‘참’이라는 명칭은 『경국대전』 체제 하에서 ‘역’으로 통일되었다. 이후 1896년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함원역의 위치는 『여지도서』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홍원현 서쪽 30리 함관령 아래에 있다고 되어 있으며, 『관북읍지』와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홍원현 서쪽 25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이항복(李恒福)의 『백사집(白沙集)』과 정온(鄭蘊)의 『동계집(桐溪集)』에는 함원역과 관련된 시가 전해진다.

참고문헌

  • 『여지도서(輿地圖書)』
  • 『관북읍지(關北邑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대동지지(大東地志)』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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