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군관(捕盜軍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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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도둑의 체포·기찰(譏察)·순라(巡邏) 등을 담당한 좌·우포도청의 군관.

개설

포도군관은 1528년(중종 23)의 실록 기사에서 확인되지만, 포도청의 창설 시기를 성종대 전반 또는 중종대 중·후반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포도군관이 언제 처음으로 설치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포도군관은 도둑의 체포,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고 행인을 검문하는 기찰, 순라를 통한 야간 통행금지와 도둑·화재의 예방 등을 담당하였고, 역적(逆賊)·사사로이 돈을 주조하는 사주전자(私鑄錢者)·천주교도 등도 체포하였다. 이러한 임무를 잘 수행한 포도군관에게는 품계를 올려 주는 등의 상이 제공되었다.

포도군관은 1541년 좌·우변포도청에 각각 10명이 설치되었는데, 그 후 도적의 노략질이 심하다는 이유 등으로 추가로 설치되어 1703년(숙종 29)에는 부장(部將) 4명을 포함하여 좌포도청 32명과 우포도청 36명으로 증가하였다.

한편 포도군관은 1894년(고종 31) 포도청이 혁파되고 경무청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담당 직무

포도군관의 핵심 임무는 ‘도둑 체포, 기찰, 순라’였다. 우선 포도군관은 도둑의 체포와 기찰 등을 담당하였다. 즉 1644년(인조 22) 우변포도청 군관이 창릉의 산속에 숨어 있다가 인명을 살해한 도적의 패거리 팽조와 석지 등을 체포하였고, 1703년(숙종 29)에는 금군에서 새로 포도군관에 임명된 가출군관(加出軍官)김진성 등이 서강(西江) 근처에서 기찰을 하다가 소를 훔쳐 도살한 남자 종[奴] 등을 체포하였다. 이처럼 도적을 체포한 포도군관에게는 품계를 올려 주는 등의 상을 주었다.

아울러 1721년(경종 1) 황해도 서흥에서 도적이 대낮에 사람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경종실록』 1년 4월 25일), 포도군관을 먼 곳에 파견하지 않는다는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도적을 효과적으로 체포하기 위해 극적(劇賊)이 나타난 곳에는 포도군관을 파견하였다. 새로 임명된 포도군관이 엿보기를 못해 도적을 잡지 못하자 각 군문의 군관이나 한산(閑散) 중에서 성실하고 엿보기를 잘하는 2명을 포도군관으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포도군관이 상을 받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잔혹하게 다스려 도둑으로 만들거나 도둑의 패거리로 몰아 돈을 요구하여 가산을 탕진시키고, 진짜 도둑은 뇌물을 받고 풀어 주는 등의 문제점도 발생하였다.

포도군관은 역적의 체포도 담당하였다. 1617년(광해 9)에는 포도군관이영생이 역적 이춘기를 체포한 공으로 품계가 높아졌고, 1629년(인조 7) 포도군관황애남은 역적 임경사와 박춘남의 체포에 제일 큰 공훈을 세웠다고 하여 6품직에 제수되었다. 1728년(영조 4) 무신년에 역적을 잡아온 좌·우포도청의 군관은 품계를 올려 주는 등의 상을 받았다.

포도군관은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야간 통행금지는 물론이고 도둑·화재 등을 예방하기 위해 순라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만기요람』에 의하면 좌포도청 포도군관 8명 및 군사 22명, 그리고 우포도청 포도군관 8명 및 군사 16명은 각각 8패(牌)로 나누어 훈련도감·금위영·어영청과 함께 경성(京城) 내외의 순라를 담당하였다.

아울러 이처럼 밤낮으로 근무하는 포도군관의 고생을 인정하여 근무일수[仕日]를 2배로 계산해 주는 반면, 포도군관이 순라와 관련된 잘못을 저지를 경우 처벌함으로써 순라를 충실하게 하도록 유도하였다. 즉 1594년(선조 27) 밤에 가옥을 뜯어간 사람을 검거하지 못하고 1637년(인조 15) 도성에서 도둑이 부부를 죽이고 집을 불태운 사건이 발생하자(『인조실록』 15년 12월 30일) 정부는 포도군관을 잡아 가두고 벌을 주도록 하였다. 1786년(정조 10)에는 우포도청의 관할 지역인 마포에서 화재가 일어난 사실을 늦게 보고한 포도군관에게 곤장 10대를 때렸다.

그 밖에 포도군관은 사사로이 돈을 주조해 유통시킨 자,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을 저지른 자, 삼강오상(三綱五常)에 어긋난 죄를 저지른 자, 불법적으로 술을 제조한 자, 천주교도, 임진왜란 때 간첩 및 명군(明軍) 도망병도 체포하였다. 왕이 거둥하거나 중국 사신이 서울에 머무를 때 호위도 담당하였다.

변천

좌·우포도청은 포도군관을 비롯하여 각각 ‘종2품 대장, 종6품 종사관(從事官), 부장, 군사(軍士)’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종종 포도군관을 포도부장에 또는 포도부장을 포도군관에 포함시켜 파악하기도 하였다.

포도군관은 1541년(중종 36) 좌·우변포도청에 각각 포도군관 10명을 비롯하여 부장 3명과 군사 50여 명이 설치되었다(『중종실록』 36년 11월 11일). 그러다가 1618년(광해군 10) 허균의 역모 사건으로 도성이 시끄러워지자 좌·우포도청을 추가로 설치하여 포도청이 4개로 늘어났고 1개 포도청종사관 이하의 인원이 1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1620년 승정원이 역옥(逆獄)도 끝났고 비용과 백성의 고통을 감안하여 원래대로 2개만 설치하자고 하였으나, 광해군이 포도청을 확대한 것은 서북 지방의 근심거리 때문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광해군일기』 12년 5월 18일). 하지만 1648년(인조 26) 『승정원일기』의 기사에 좌변포도청은 ‘부장 4명, 포도군관 19명, 군사 50명’이고 우변포도청은 ‘부장 4명, 군관 20명, 군사 50명’이라고 기재된 것에서 포도청이 2개로 환원되었고, 대신 포도군관은 9~10명이 그리고 포도부장은 1명이 각각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장 8명과 포도군관 39명은 금군의 녹봉을 받으며 포도군관에 분속된 인원이었다.

이어 1698년(숙종 24) 포도군관이 추가로 좌포도청에 3명, 그리고 우포도청에 6명 설치되었고, 1703년 도적의 노략질이 심해지자 강외(江外)에 거주하는 금군 12명의 번차(番次)를 빼 주고 좌·우포도청에 각각 6명의 포도군관을 설치하여 강교(江郊) 등에서 기찰을 담당하게 하였다. 이로써 포도부장 4명을 포함한 포도군관의 수는 좌포도청 32명과 우포도청 36명으로 증가하였는데, 1746년(영조 22) 편찬된 『속대전』이나 1865년(고종 2) 간행된 『대전회통』에서 포도군관은 포도부장 32명에 포함되었다.

한편 포도군관은 1894년 포도청이 혁파되고 경무청이 설치되는 가운데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이상식, 「포도청의 설치에 대한 고찰」, 『역사학연구』7, 1977.
  • 차기진,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과정에서의 포도청의 역할과 천주교 순교사 연구」, 『교회사학』10, 2013.
  • 차인배, 「조선시대 포도청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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