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기(重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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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호조(戶曹)에서 각 관청의 회계를 감독하거나 경외(京外)의 각 관청이 보유하고 있는 국가 재산의 누수를 막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작성토록 규정한 회계장부 또는 물품 조사서로 관리들이 해유(解由)할 때에 작성하는 이관 물품의 명세서.

개설

중기(重記)에 대한 어의(語義)는 어느 문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초본과 중초본, 정서본이 함께 남아있는 『수진궁차하책』의 예를 들어, 중기의 의미가 초본을 다시 옮겨 적은 기록이라는 의미라고도 한다.

중기는 중앙정부의 재정 운영상 필수적인 것이었다. 중앙정부에서는 항상 관료가 중간에서 공적인 재산을 사사롭게 착복하는 것을 금지하여 왔다. 이때 중기는 그 처벌에 대한 근거로써, 또는 그러한 범죄에 대한 예방 수단으로써 공적인 기능을 해왔다. 이와 같이 중기를 작성하는 목적은 뒤에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는 데 있다. 따라서 각 관서에서 사용한 물품에 대해서는 담당 관리가 즉시 중기에 올리도록 규정해두었다. 중기 작성에 대한 근만(勤慢)도 관리의 고과에 참고 하는 등 여러 가지 처벌 규정을 두었고, 또 뇌물을 받고서 중기에 거짓 기재하는 경우 사형에 처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편 지방에서 중기는 수령이 처음 부임하는 과정인 신영례(新迎禮) 때, 아전들이 호적(戶籍)이나 삼반관안(三班官案)과 더불어 바치는 장적이었다. 신임 수령은 중기를 통해 해당 고을의 재정 상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한편 교대하는 관원들의 인수인계 시 재정에 대한 증명서로서, 또는 하리의 농간을 막기 위한 근거로써 이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현존하는 중기의 예에 의거해볼 때, 중기는 회계중기(會計重記), 비품출납중기(備品出納重記), 해유중기(解由重記) 등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볼 수 있다.

① 회계중기는 전곡(錢穀) 출납에 관한 회계를 기록한 문서이다. 의영고(義盈庫)·공조(工曹)·제용감(濟用監)·내자시(內資寺)·내섬시(內贍寺)·인순부(仁順府)·인수부(仁壽府)·예빈시(禮賓寺)·장흥고(長興庫)·풍저창(豊儲倉)·광흥창(廣興倉)·각궁(各宮) 등 회계 산정이 필요한 모든 관서에서 작성되었다. 현존하는 예로써는 『경우궁받자중기책[景祐宮捧上重記冊]』, 『경우궁차하중기책(景祐宮上下重記冊)』, 『명례궁회계중기책(明禮宮會計重記冊)』, 『광흥창중기책(廣興倉重記冊)』 등을 꼽을 수 있다. 궁방과 광흥창의 회계에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계중기는 『만기요람(萬機要覽)』의 규정에 따르면 호조에서 각 관서의 재무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근거가 되는 문서로 작성·활용되었다. 호조는 각 관서의 공물의 대가를 지급한 뒤에 각 관사의 물종과 사용한 뒤에 되돌려 주는 물종에 대해서 호조에서 발행한 출납 명령서의 원본인 원관(元關)에 의하여 장부에 기록하고, 당해 관서에서도 출납 명령서인 출관(出關)에 의해서 받자중기[捧上重記]를 상세히 기록한다. 이와 같이 작성된 중기에 의거하여 3월·6월·9월·12월에 호조의 회계사 낭청과 담당 계사(計士)가 호조의 치부책과 당해 관사의 받자중기를 대조하였다. 물종이 빠짐없이 기록이 된 경우에, 해당 관사의 관원에게 녹봉 지급이 허가되고, 만일 누락이 있으면 녹봉의 지급을 중단하였다. 『탁지지』에는 이에 대한 벌칙을 비교적 상세히 덧붙이고 있다. “만일 빠뜨리고 중기에 올리지 않는 일이 있으면 해당 관서의 관원에게 그 많고 적음에 따라 감봉의 벌을 내린다. 6월과 12월의 포폄 때에는 이것으로 전최를 평정하고 전직(轉職)한 뒤에도 이에 의거하여 살펴보고 해유 문서를 작성하여 내어주게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이 회계중기의 특징은 해당 관서에 상시적으로 비치하여 호조의 관(關)이 올 때마다 기록하고 1년에 4번 호조 낭관에 의하여 기록의 정확성 여부를 점검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회계중기의 작성 방식은 대개 유사하다. 1책당 1년분의 회계를 수록하였다. 이것을 다시 매월당 기록하고 있다. 궁방에서 이용하고 있는 중기를 살펴보면 대개 삼책으로 회계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경우궁받자중기책』은 경우궁이 받아들인 물자의 내역이 실려있고, 『경우궁차하중기책[景祐宮上下重記冊]』은 내린 물자의 내역, 회계책은 받자책과 차하책이 합산되어 있다. 『광흥창차하중기[廣興倉上下重記]』도 회계중기에 속한다. 표제가 『백관반록부』라고 되어있고 1850년(철종 1)의 녹봉을 반사할 대상 인물 및 녹봉의 액수를 달별로 적고 맨 마지막에 총괄적인 회계 사항을 적고 있다. 월, 부서, 품계 등 고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목판으로 찍고, 그 나머지 인명, 녹봉 등 가변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필사하고 있어서, 매년 손쉽게 작성할 수 있도록 짜여져 있다.

이와 같이 전곡을 출납하는 회계중기는 2벌을 장부로 만들되, 1벌은 각각 그 관서에 보관하고 다른 1벌은 일정 기간마다 호조에 보고하였다. 이를 통해 호조에서는 각 관청의 전곡 출납을 회계 빙고 하여 관료의 부정을 막으려 하였다.

② 비품출납중기는 각 관청이 가지고 있는 재산의 출납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각 관청에 있는 국가 재산의 증감과 그것을 담당하는 공적과 과실을 파악하여 관리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관청의 비품은 특정한 물품별로 조사하여 작성하기도 하고, 또는 관청별로 조사하여 작성하기도 하였다. 물품별로 작성된 예로는 『호서감영미포중기(湖西監營米布重記)』, 『호남지통중기(湖南紙筒重記)』, 『호남순검곡중기(湖南巡檢穀重記)』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관청 별로 작성한 예로는 『군기색중기(軍器色重記)』, 『훈련도감중기(訓鍊都監重記)』, 『영영삼조창중기(嶺營三漕倉重記)』 등이 있다. 그 밖에 고을의 중기에는 보관되어 있는 기록물과 서책의 목록이 실려있어 당시 기록물 관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이 가운데 『군기색중기』를 예로 들어보면, 이 중기는 1875년(고종 12)에 무위소(武衛所)의 군기 현황을 점검하여 작성한 것이다. 이 중기의 기재 방식에서 특기할 점은 군기색(軍器色) 아래의 하위 분류로 질차(秩次)를 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질(秩)’은 동일 또는 동종의 기능이나 행위를 하는 낱낱의 물품이나 행위를 한데 묶어서 표현하는 말로, 기록 및 회계의 구분 단위인 계정을 뜻하는 특수 용어이다. 이 책에는 총위영이래질(總衛營移來秩), 금화기계질(禁火器械秩) , 훈련도감이래질(訓鍊都監移來秩) 등 물자가 들어오는 곳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③ 해유중기란 관리의 해유 과정에서 소장한 물품을 인수인계할 때 사용되는 중기를 말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중기해유는 문서명으로서 교대할 때에 주고받은 물건들을 갖추어 기록하여 후일 상고할 때 증빙으로 삼는다.”라고 정의하고 있다(『명종실록』 18년 7월 15일). 애초에 해유 문서만으로 해유하던 것을 성종조에 이르러서 중기를 첨부하게 하였다. 아마 당시부터 해유 과정이 해유 문서만으로는 입증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해유 문서에 기재된 물목을 그것만으로 입증할 수 없었기 때문에 또 다른 증빙서류가 필요했다. 이러한 규례는 조선후기까지 지속되었다. 해유중기의 예로서 강화유수의 이임 시 작성된 1831년(순조 31)의 『심도중기(沁都重記)』, 1852년(철종 3)의 『경상우병영체등중기(慶尙右兵營遞等重記)』, 『조등내중기(趙等內重記)』 등이 있다.

변천

고려시대의 문헌이나 중국 원대의 대표적인 사료인 『원전장(元典章)』에도 중기란 용어가 발견되고 있지 않으므로 해당 시대에 중기라는 용어가 사용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명률(大明律)』에서 관리의 이임 시에 중기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중기는 명대 이후에 사용되어 조선에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짐작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기라는 용어는 조선 태종조에서 처음 발견되는데 그 이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중기 제도의 변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지방관의 해유제와 중기가 결합하고 있다는 점이다. 『경국대전』이 성립된 바로 직후에 호조에서는 해유 과정에서 해유 문서 이외에 중기를 함께 상고하는 법을 세웠던 것 같다. 해유 문서에 중기를 첨부하여 보고하는 법을 세운 것인데, 이는 중앙 정부에서 지방의 회계 출납을 통제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이때 첨부된 중기는 원래 그 고을의 창고 중기와 비교하면 약간 상이한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중앙에서 관리하는 재물이 지정되어 있으며 창고의 모든 물건이 그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의의

중기는 재정과 관련된 아문들의 출납을 위하여 상시적으로 또는 관리의 해유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작성되었다. 각 관서별로 작성될 경우 그 특성에 따라 제각기 작성 방식에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당시의 기록 문화를 살필 수 있다. 더욱이 중기는 재무와 관련된 관서를 포함한 전 관청에서 작성되었고, 재무 상황에 대한 신뢰할 만한 문서로서 여타의 재무 관계 문서에 비해 더욱 비중 있게 취급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중기는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의 재무 상황을 총괄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성된 문서였던 만큼, 중앙집권적인 관료제하에서 특히 지방의 회계를 직접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필연적인 산물이었다. 중기를 통해 당시 지방재정 및 기록 관리의 실태를 엿볼 수 있으며, 무엇보다 지방재정의 중앙 통제와 그에 따른 윤리적 변화의 실태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 『대명률(大明律)』
  • 『만기요람(萬機要覽)』
  • 『광재물보(廣才物譜)』
  • 문세영, 『조선어사전(朝鮮語辭典)』, 조선어사전간행회, 1938.
  • 김혁, 「고문서용어 풀이- 重記」, 『古文書硏究』 19, 2001.
  • 남권희, 「重記資料 分析에 의한 朝鮮時代 地方 官衙의 記錄管理」, 『社會科學』 14, 慶北大學校 社會科學大學, 2002.
  • 박원택, 「조선조의 관청회계 - 중기와 해유를 중심으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7.
  • 조영준, 「19世紀 왕실재정의 운영실태와 변화양상」,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8.
  • 조영준, 「宮房 會計帳簿의 體系와 性格」, 『古文書硏究』 3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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