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뢰(尊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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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준뢰 |
한글표제 | 준뢰 |
한자표제 | 尊罍 |
하위어 | 대준(大尊), 산뢰(山罍), 산준(山尊), 상준(象尊), 착준(著尊), 호준(壺尊), 희준(犧尊) |
관련어 | 명수(明水), 범제(泛齊), 사주(事酒), 삼주(三酒), 석주(昔酒), 앙제(盎齊), 예제(醴齊), 오제(五齊), 청주(淸酒), 체제[緹齊], 침제(沈齊), 현주(玄酒) |
분야 | 왕실/왕실의례/예기 |
유형 | 물품·도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박봉주 |
용도 | 국가 제례의 작헌(酌獻) 절차에서 술과 맑은 물인 명수(明水), 현주(玄酒)를 담아 두는 용도 |
재질 | 청동(靑銅)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준뢰(尊罍) |
국가 제사 의례에 사용된 제기(祭器)로서 5종의 준(尊)과 1종의 뢰(罍)를 합쳐서 이르는 용어.
개설
준(尊)과 뢰(罍)는 조선시대의 국가 제례에서 술과 ‘명수(明水)’와 ‘현주(玄酒)’라는 맑은 물을 담는 데 사용된 6종류의 큰 술동이들을 총칭한다. 실제로는 5준 1뢰를 의미하며, 그런 의미에서 일반적으로 ‘준뢰’로 통칭된다.
연원 및 변천
한국과 중국에서는 고래로부터 6종의 준을 각종 국가 제례에서 술과 맑은 물을 담아 두는 용도로 함께 상용해 왔다. 몸체의 외형이나 몸체 표면에 새겨 넣는 문양에 따라 6종으로 나누어지는데, 희생 문양이 있는 희준(犧尊), 코끼리 문양의 상준(象尊), 기물 바닥이 지면에 그대로 닿는 착준(著尊), 입구가 넓고 몸체가 불룩하며 음기(陰氣)가 사방을 둘러싸서 만물을 간직하는 모습을 상징하는 문양을 새긴 호준(壺尊), 입구가 넓고 몸체가 불룩하며 그림이나 장식을 새기지 않은 밋밋한 모양의 대준(大尊), 산에 구름이 낀 형세를 새기거나 그려 넣은 산준(山尊)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산준은 산뢰(山罍)라고도 칭하였다.
6종의 준은 제례별로 수량과 조합을 달리하면서, 헌관(獻官)이 신위 앞에 술잔을 올리는 의식인 작헌(酌獻) 절차에서 신령에게 올리기 위해 사용되는 술로서 탁주인 범제(泛齊), 단술인 예제(醴齊), 흰빛이 도는 앙제(盎齊), 붉은빛이 도는 체제[緹齊], 찌꺼기가 가라앉는 침제(沈齊) 등의 오제(五齊)를 담았다. 또한, 제사 참석자들이 나눠 마시는 용도로 사용되는 술로서 일이 있을 때마다 빚은 술로 제사의 집사자들이 마시는 사주(事酒), 겨울에 빚어 이듬해 봄까지 익힌 석주(昔酒), 겨울에 빚어 이듬해 여름까지 익힌 청주(淸酒) 등의 삼주(三酒) 및 달밤에 거울로 달을 비춰 맺힌 이슬을 모아 만든 맑은 물인 명수(明水), 맑고 깨끗한 물로 대개 정화수(井華水)라고 하는 현주(玄酒) 등을 담아 두는 데 사용되었다.
중국 고대의 삼례(三禮), 즉 『예기(禮記)』, 『주례(周禮)』, 『의례(儀禮)』에서 6준, 즉 5준 1뢰에 관련된 기본 규정이 정립되었는데, 희준·상준, 착준·호준, 대준·산준의 2종씩 짝을 이루어 춘추(春秋) 제례, 추동(秋冬) 제례, 체제(禘祭)와 협제(祫祭)에 각각 사용되는 방식이었다. 다만 6준마다 오제 중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술을 담는지에 대해서는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6준과 오제의 조합 방식을 알기 어렵다. 한편 이들과 함께 뢰를 별도로 두어 삼주 중 한 종류의 술을 담았다고 하는데, 이 뢰는 산뢰, 즉 산준과는 구분되는 다른 종류의 뢰로 추측된다. 그런데 당대부터는 산뢰, 즉 산준에 삼주와 현주를 담게 되고 명칭도 산준 대신 산뢰만을 상용하게 되면서, 뢰와 산뢰의 구분이 사실상 없어짐으로써 5준 1뢰의 진설(陳設) 방식으로 굳어진 듯하다.
조선시대의 국가 제례에서 사용된 5준 1뢰는 이상과 같은 규정을 계승하되, 조선의 제사 분류 체계인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 기고(祈告), 주현(州縣), 속제(俗祭)에 따라 좀 더 세분화, 개별화된 유형들을 보여주며, 이 과정에서 취사선택과 응용된 부분도 확인된다. 대체로 규모가 크고 격식과 등급이 높은 대사, 중사 급의 제례일수록 보다 다양한 종류의 준뢰가 진설되었고, 소사 이하의 작은 제례에서는 1~2종의 준뢰만이, 심지어는 1병의 준이나 뢰만이 진설되기도 하였다.
형태
준·뢰의 도설과 외형, 제작 규격 등은 고금을 통해 계속 진화하였는데, 전대의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좀 더 진일보한 양식과 합리적인 규격을 갖춘 새로운 도설들을 차례로 수록하였다. 조선시대의 국가 제례에 수용된 준·뢰의 도설과 용례는 중국의 ‘삼례’,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 『삼례도(三禮圖)』, 『예서(禮書)』, 『소희주현석전의도(紹熙州縣釋奠儀圖)』, 『대명집례(大明集禮)』 등에서 종합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수용 과정에서 독자적으로 취사선택한 부분도 확인된다. 『세종실록』「오례」에 수록된 준·뢰의 도설은 『예서』와 『소희주현석전의도』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성종대의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의 도설은 『소희주현석전의도』를 계승한 것이다. 이에 비해 정조대의 『춘관통고(春官通考)』의 도설은 『대명집례』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춘관통고』와 비슷한 연대에 제작된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 『경모궁의궤(景慕宮儀軌)』 등도 『춘관통고』, 『대명집례』와 흡사한 준·뢰의 도설을 수록하였다. 그런데 『국조오례서례』와 『춘관통고』의 중간 시기인 숙종 연간에 제작된 『종묘의궤(宗廟儀軌)』에서는 양자와는 다른 독특한 유형의 그림을 일부 수록하여 주목된다. 또한 대한제국기에 편찬된 『대한예전(大韓禮典)』에서는 오히려 『국조오례서례』와 흡사한 유형으로 복귀하는 듯한 흐름을 보여준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例)』
- 『춘관통고(春官通考)』
- 박봉주, 「조선시대 국가 祭禮와 尊·罍의 사용」, 『조선시대사학보』58,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