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제(祫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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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자나 제후가 3년에 한 번씩, 대수(代數)가 지나 종묘에서 출향(出享)된 선대 왕들의 신위를 태조의 신위와 함께 모시고 지내는 제사.

개설

‘협(祫)’은 여러 사람을 함께 모시는 제사 곧 ‘합제(合祭)’를 가리키는 말로, 합제선조(合祭先祖)를 뜻한다. 종묘 및 별묘에 안치된 신위를 태조 묘에 모셔와 지내는 제사에는 체제(褅祭)와 협제 두 가지가 있는데, 체제는 5년에 한 번씩 맹하(孟夏)인 음력 4월에, 협제는 3년에 한 번씩 맹동(孟冬)인 음력10월에 거행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체제와 협제가 종묘의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체제가 천자의 예로 간주되어 제후국인 조선에서는 시행할 수 없는 의식으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체제는 폐지되고, 협제에 대한 의식의 정비만이 이루어졌다. 1415년(태종 15)에 ‘종묘친협제의(宗廟親祫祭儀)’와 ‘종묘친협섭사의(宗廟親祫攝事儀)’가 제정되었고, 이 내용은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협제 역시 실제로는 행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도 관련 의주가 실려 있지 않다. 종묘에는 정전 외에 영녕전을 두어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의 신위를 모셨는데, 태조의 선조인 이들의 신위를 태조 묘로 옮겨 제사하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결과 별묘인 영녕전에서 봄과 가을에 지내는 제사로 협제를 대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연원 및 변천

『송사(宋史)』에 따르면, 새로운 왕은 왕위를 계승한 지 3년 만에, 선왕(先王)의 상(喪)을 당한 지 27개월 만에 담제(禫祭)를 지내고, 그 뒤 신주를 부묘(祔廟)하고 특별히 체제를 행하였으며, 그해 10월에 협제를 행하였다(『성종실록』 16년 윤4월 2일).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이를 수용하였다. 체제와 협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고려사(高麗史)』 「예지(禮志)」의 체협친향의(褅祫親享儀)에 수록되어 있다. 『고려사』「세가(世家)」에도 문종대부터 고종대까지 여러 차례 협제를 거행한 기록이 남아 있는데, 그 시기 면에서는 맹동인 10월을 정확히 준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체협친향의에 따르면, 태조의 신주는 동쪽에 서향하도록 모셨고, 그 이하의 신주들은 모두 소목(昭穆)의 위차에 따라 남쪽과 북쪽에 각각 북쪽과 남쪽을 향하도록 모신 것이 중국과는 다른 특징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고려시대의 예에 따라 체제와 협제를 준행할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있었는데, 체제는 천자의 예로 간주되어 예제의 정비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415년(태종 15)에는 예조(禮曹)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에서 각종 제사 의식을 정비하면서 ‘종묘친협제의’와 ‘종묘친협섭사의’를 제정하였다. 1421년(세종 3)에는 송나라의 종묘 제도를 본받아 종묘 안에 별묘인 영녕전을 세우고 그곳에 조천(祧遷)한 신주들을 모시게 하였다. 그런데 협제를 지낼 때 선조들의 신주를 태조의 신주가 있는 정전(正殿)으로 옮겨와야 하는 문제가 생겼다. 이에 송나라에서는 별묘에 모신 4대(代)에게 먼저 제사를 지낸 뒤 정전에 제사하도록 하였는데, 조선에서도 마찬가지로 영녕전에 대한 제사를 별개로 진행하도록 하고 이를 협제에 준하는 것으로 여겼다. 『세조실록』을 살펴보면 조선에 파견된 명나라 사신도 영녕전에 대한 제향을 협제로 인식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세조실록』 10년 6월 15일).

절차 및 내용

조선시대에 거행된 협제의 절차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세종실록』 「오례」에 수록된 의주가 유일하다. 종묘에서는 사맹삭(四孟朔) 상순마다 제사를 지냈는데, 협제는 맹동인 10월의 제향일이 지난 뒤 길일을 택하여 지낸다. 별전에서 4일 동안 산재(散齋)를 하고, 2일은 정전에서, 1일은 재궁(齋宮)에서 치재(致齋)를 행한다. 그 뒤 거가출궁(車駕出宮), 신관(晨祼), 초헌(初獻), 아헌(亞獻), 종헌(終獻), 음복(飮福), 거가환궁(車駕還宮)의 순으로 진행된다. 초헌은 술잔을 올리는 헌작(獻爵), 축문(祝文)을 읽는 독축(讀祝), 재배(再拜)의 순서로 이루어지는데, 목조의 신주부터 태조의 신주까지 각각 술잔을 올리고 축문을 읽는다. 또한 각 신주에 대한 헌례(獻禮)를 행할 때 음악 역시 각기 다른 것을 사용한다. 아헌과 종헌은 독축을 제외하고는 모두 초헌과 같은 순서로 진행한다. 한편 아헌과 종헌을 거행할 때는 공신당(功臣堂)과 칠사당(七祀堂)에도 동시에 작헌(酌獻)을 한다.

신주는 소목의 자리에 따라 지게문[戶外] 밖에 설치하였는데,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동쪽으로 배열하였다. 황현조(皇玄祖) 목왕(穆王)·황증조(皇曾祖) 도왕(度王)·황고(皇考) 태조(太祖) 강헌대왕(康獻大王)의 신주는 북쪽에 두어 남향하게 하고, 황고조(皇高祖) 익왕(翼王)·황조(皇祖) 환왕(桓王)의 신주는 남쪽에 두어 북향하게 하였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협제는 제후의 예여서, 민간에서는 함부로 지낼 수 없었다. 그 대신 민간에는 일 년에 한 번씩 시조(始祖) 이하의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시제(時祭)가 있었다. 시제는 오늘날에도 각 문중의 주요 행사로 활발히 거행되고 있으며, 문중을 규합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지두환, 『조선전기 의례연구 - 성리학 정통론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 한형주, 『조선초기 국가제례 연구』, 일조각,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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