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속(趙涑)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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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조속 |
한글표제 | 조속 |
한자표제 | 趙涑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예술·체육인/화가, 예술·체육인/서예가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인조~현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희온(希溫), 경온(景溫) |
호 | 창강(滄江), 창추(滄醜), 취추(醉醜), 취옹(醉翁), 취병(醉病)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5년(선조28) |
사망 | 1668년(현종9) 8월 4일 |
본관 | 풍양(豊壤) |
주거지 | 경기도 과천(果川)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광암리(廣巖里) |
증조부 | 조종경(趙宗敬) |
조부 | 조정기(趙廷機) |
부 | 조수륜(趙守倫) |
모_외조 |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선복(鄭善復)의 딸, 정대년(鄭大年)의 손녀 →(자녀)3남 3녀 |
형제 | (형)조척(趙滌), 조일(趙溢) |
처_장인 | (첫째부인)청주이씨(淸州李氏): 이효립(李孝立)의 딸 →(자녀)1남 5녀 (둘째부인)전주이씨(全州李氏): 이권(李權)의 딸 →(자녀)1녀 |
자녀 | (1자)조지운(趙之耘) (1녀)김익진(金益振)의 처 (2녀)신만(申曼)의 처 (3녀)이행하(李行夏)의 처 (4녀)한여천(韓如川)의 처 (5녀)박태상(朴泰尙)의 처 (6녀)이만근(李萬根)의 처 |
저술문집 | 『창강일기(滄江日記)』 |
작품 | 「호촌연의도(湖村煙疑圖)」, 「금궤도(金櫃圖)」,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 「매작도(梅鵲圖)」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조속(趙涑) |
총론
[1595년(선조28)∼1668년(현종9) = 74세]. 조선 후기 인조~현종 때의 서화가. 자는 희온(希溫) · 경온(景溫), 호는 창강(滄江) · 창추(滄醜) · 취추(醉醜) · 취옹(醉翁) · 취병(醉病)이다. 본관은 풍양(豊壤)이고, 주거지는 경기도 과천(果川)이다. 아버지는 호조 좌랑(佐郞)조수륜(趙守倫)이고, 어머니 동래정씨(東萊鄭氏)는 현감정선복(鄭善復)의 딸이자, 좌찬성(左贊成)정대년(鄭大年)의 손녀이다. 문인화가(文人畵家) 조지운(趙之耘)의 아버지이고, 이조 판서이후원(李厚源)과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김원량(金元亮)과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인조~현종 시대 활동
조속(趙涑)의 아버지 조수륜(趙守倫)은 1612년(광해군4) <신율(申慄)의 옥사>에 연루되어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18세였다. 그는 억울하고 분하여, 그 사건 이후 10년 동안 사람들과 말하고 웃는 일 없이 살면서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계획에 그 친구 이후원(李厚源) · 김원량(金元亮)과 함께 참여하여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였다. 거사가 실패하면 죽을 각오를 하였으나, 마침내 거사가 성공하여 아버지를 무함한 자들을 모두 죽이고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반정(反正)에 참여한 공을 말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거사하던 날 고향 과천으로 돌아가서 반정에 참여하지 않은 것처럼 숨겼으므로, 반정 공신으로 책훈(策勳)하는 데에 참여하지 못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3 참조) 그러나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그의 묘표(墓表)에 의하면, “1623년 그의 나이가 29세였는데, 정사공신(靖社功臣)의 제공(諸公)들과 더불어 반정(反正)의 모의에 협찬하여, 진주(眞主: 인조)를 추대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주륙(誅戮)하고, 그날 바로 향리(鄕里)로 돌아가서 공신의 책훈(策勳)을 극력 사양하였다.” 하였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1 「창강조공속묘표(滄江趙公涑墓表)」 참조) 그는 벼슬할 생각을 버렸으므로, 스스로 정사공신에 책훈되는 것을 사양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조속은 과거를 포기하고 서화(書畵)의 세계에 몰입하여 독특한 경지를 개척하였다. 그의 친구 김원량이 억울하게 죽자 더욱 정치를 혐오하여, 벼슬에 임명되더라도 거의 모두 사양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의 강력한 권유 때문에 마지못하여 부임한 때도 더러 있었다. 인조 때에는 경상도덕산현감(德山監)과 전라도김제군수(金堤郡守)가 되었고, 효종 때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현종 때에는 상의원(尙衣院)정(正)이 되었다. 1648년(인조26) 암행어사(暗行御史)심택(沈澤)이 “김제군수조속은 자신을 청간(淸簡)하게 규제하여 백성들이 모두 편안히 생업을 영위하고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인조가 조속에게 표리(表裏) 1벌을 상으로 하사하기도 하였다. 효종 때 그를 시종(侍從)으로 발탁하였으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다. 1668년(현종9) 8월 초4일 병으로 서울의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74세였다.
저서로 『창강일기(滄江日記)』가 있다.
서화가 조속
그는 ‘시(詩) · 서(書) · 화(畵)의 삼절(三絶)’로 유명하다. 그림은 매화 · 대나무 등을 위주로 하는 ‘수묵화조화(水墨花鳥畵)’를 잘 그렸다. 특히 까치나 수금(水禽) 등을 소재로 한 ‘수묵화조화’에서 독특한 화풍을 이룩하여 조선 중기 ‘수묵화조화’의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명대(明代)의 ‘수묵사의화조(水墨寫意花鳥)’ 화가 임량(林良)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그보다 한 단계 발전된 그림으로서 성기고 까칠한 붓질과 도안적인 형태들이 어우러져 생동감이 넘친다. 이것은 한국 특유의 정취가 짙은 서정 세계와 상통되는 그림이다. 이러한 화풍은 조속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아들 조지운(趙之耘)을 거쳐서, 전충효(全忠孝) · 이함(李涵) · 이하영(李夏英) 등으로 이어졌다.
또 그의 작품 가운데에는 중국 송(宋)나라 시대 남종화풍(南宗畵風)이 깃들어 있는 작품이 발견되는데, 「호촌연의도(湖村煙疑圖)」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미법(米法)을 기조로 하여 그려진 「호촌연의도」>는 조선시대 남종화(南宗畵)의 발전에서 그 초기 단계를 밝히는 데 중요한 의의를 지닌 작품이다. 그는 남종화풍으로 주목되는 작품들을 남긴 화가로 높이 평가된다.
그 밖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금궤도(金櫃圖)」는 공필풍(工筆風)의 작품이다. 글씨는 중국 원(元)나라 시대 조맹부(趙孟頫)의 송설체(松雪體)를 발전시킨 독특한 필체를 썼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노수서작도(老樹棲鵲圖)」와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작도(梅鵲圖)」등이 그 대표작이다.
그는 끼니를 걸러야 하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고금의 명화와 명필을 수집하여, 감상하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또한 유명한 화가의 그림과 역대 명필들의 글씨를 발굴하여 그 발전 계보를 연구하였다. 특히 글씨에서 그 진적(眞蹟)을 발굴하고 금석문(金石文)의 수집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이 방면의 선구자로도 꼽힌다.
성품과 일화
조속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가 맑고 깨끗하였을 뿐 아니라, 지조가 높고 청빈하였다. 겉모습은 매우 온순하고 공경하였으나 그 속마음은 매우 분명하여 세간(世間)의 일들에 대하여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알지 못하는 바가 없었으나, 마치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과 같았고, 능하지 못한 바가 없었으나, 마치 아무 것도 능한 것이 없는 사람과 같았다. 몸가짐을 단정하고 장중하게 가다듬어 조금도 나태함이 없었으며, 말씨는 온순하여 화기가 넘쳤다. 나랏일을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여 감탄하고 한숨짓는 마음은 마치 단주(丹朱)처럼 분명하였다. 거친 밥과 나물국을 먹으며 허물어진 담장의 초라한 집에서 사는 것에 대하여 남들은 그 괴로움을 견뎌내지 못하겠지만, 그는 느긋하고 편안하게 지내면서 마음에 흔들리는 바가 없었다.
아버지 조수륜이 화를 당하자, 그는 자기 몸을 마치 토목(土木)처럼 하찮게 굴렸다. 아무리 춥더라도 따뜻한 방에서 지내지 않았고 아무리 덥더라도 서늘한 곳에 나아가지 않으면서 항상 거상(居喪)할 때와 똑같이 지냈던 것이다. <인조반정>을 거사하던 날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모두 죽을 각오를 하였다. 이윽고 반정에 성공하자, 정사에 참여한 제공(諸公)들 대부분이 부귀영화에 빠져들었다. 이에 그의 친구 김원량이 그들을 비루하게 여겨서 이를 비판하다가 죽음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 조속은 정치와 더욱 멀어졌다.
그는 끼니조차 여러 번 떨어졌는데도 하사받은 전토(田土)와 노비들을 내버려두고 챙기지 않기도 하였다. 젊었을 때부터 문예(文藝)가 남보다 뛰어났던 그는 말을 하면 번번이 남을 놀라게 하였으며, 서화(書畵)의 기예에 대해서도 그 조예가 깊고 절묘하였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오직 분노와 욕망이다. 그것을 징계하고 틀어막는 공부를 용감하고 또 용맹하게 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사람은 모름지기 분수를 편안히 여겨야 한다. 분수를 편안히 여기지 않으면 곧 그 자신을 잃게 된다.”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광암리(廣巖里) 언덕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친구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광주(廣州)의 수곡서원(秀谷書院), 과천의 호계서원(虎溪書院), 서천(舒川)의 건암서원(建巖書院), 김제(金堤)의 백석사(白石祠)에 제향되었다. 첫째 부인 청주이씨(淸州李氏)는 주부(主簿)이효립(李孝立)의 딸로, 자녀는 1남 5녀를 두었다. 둘째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충의위(忠義衛)이권(李權)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두었다. 외아들 조지운(趙之耘)은 문인화가이고, 5녀는 이조 판서박태상(朴泰尙)의 아내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둔촌잡영(遁村雜詠)』
- 『면앙집(俛仰集)』
- 『백석유고(白石遺稿)』
- 『백헌집(白軒集)』
- 『야곡집(冶谷集)』
- 『약헌집(約軒集)』
- 『염헌집(恬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