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제(李先齊)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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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이선제 |
한글표제 | 이선제 |
한자표제 | 李先齊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단종 |
집필자 | 홍연주 |
자 | 가보(家父) |
호 | 필문(篳門)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390년(공양왕 2) |
사망 | 1454년(단종 2) |
본관 | 광주(光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535-1 |
증조부 | 이기(李奇) |
조부 | 이홍길(李弘吉) |
부 | 이일영(李日英) |
처_장인 | 보성 선씨(寶城宣氏) : 선윤지(宣允祉)의 딸 →(자녀)5남 1녀 |
자녀 | (1남) 이시원(李始元) (5남) 이형원(李亨元) |
저술문집 |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이선제(李先齊)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5년 12월 29일, 『세종실록』24년 3월 12일, 『세종실록』 26년 10월 10일, 『세종실록』 28년 6월 27일, 『세종실록』 29년 9월 23일, 『세종실록』 29년 12월 3일, 『세종실록』 30년 10월 8일, 『세종실록』 30년 12월 1일, 『세종실록』31년 1월 5일, 『세종실록』31년 1월 28일, 『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 『문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0일, 『문종실록』 1년 8월 30일, 『문종실록』 2년 2월 20일, 『단종실록』 즉위년 6월 28일, 『단종실록』즉위년 12월 25일 |
총론
[1390(공양왕 2)~1454년(단종 2) = 65세]. 조선 초기 세종(世宗)~단종(端宗) 때의 문신.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와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 등을 지냈다. 자는 가보(家父)이고, 호는 필문(篳門)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장흥부사(長興府使)를 지낸 이일영(李日英)이고, 할아버지는 고려 때 밀직제학을 지낸 이홍길(李弘吉)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기(李奇)이다.
세종 시대 활동
권근(權近)의 문하에서 글을 배운 이선제는 1419년(세종 1) 증광시 문과에 급제한 후 1423년(세종 5)『고려사(高麗史)』를 개수할 때 사관(史官)으로 참여하였다. 이때 정도전(鄭道傳) 등이 앞서 편찬한 『고려사』가 이색(李穡)·이인복(李仁復)이 지은 『금경록(金鏡錄)』을 참고하는 바람에 사실(史實)과 다른 점이 많다고 지적하며 그 실상을 직서(直敍)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5년 12월 29일) 1431년(세종 13) 집현전(集賢殿)부교리(副校理)로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이 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으며,[『태종실록』 부록] 1442년(세종 24)에는 흥천사(興天寺) 사리각(舍利閣) 경찬소문(慶讚疏文)을 지어 올렸다.(『세종실록』24년 3월 12일)
이선제는 1442년부터 1444년(세종 26) 사이 첨사원(詹事院) 동첨사(同詹事)·형조 참의(參議)·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병조 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26년 10월 10일) 이후 예조 참의에 봉직하면서 백성들의 삶에 있어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소금의 전매(專賣) 불가를 논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28년 6월 27일),(『세종실록』 29년 9월 23일)
1447년(세종 29) 호조 참판(參判)에 오른 이선제는(『세종실록』 29년 12월 3일) 이듬해 하정사(賀正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온 후(『세종실록』 30년 10월 8일) 공조 참판(參判)에 제수되었다.(『세종실록』 30년 12월 1일) 한 달 후 다시 호조 참판이 되었는데, 이때 『고려사』 개찬을 감장(監掌)하였다.(『세종실록』31년 1월 5일),(『세종실록』31년 1월 28일)
문종~단종 시대 활동
문종 즉위 후 예문관 제학에 제수되었으며,(『문종실록』 즉위년 7월 6일) 세자의 첫 번째 서연에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나아가 『소학(小學)』을 강론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이선제는 임금에게 서북지방의 군제(軍制) 정비, 야인의 객관(客館) 별치(別置), 어염세(魚鹽稅)의 확보를 통한 국가 재정 확충 등을 건의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10일) 그러는 가운데 1449년(세종 31)부터 시작되었던 『고려사』 편수가 1451년(문종 1)에 완료되자 그 공으로 이선제는 문종으로부터 안장을 갖춘 말 1필을 하사 받았으며,(『문종실록』 1년 8월 30일) 이듬해에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에도 참여하였다.(『문종실록』 2년 2월 20일)
같은 해 2월 경창부윤(慶昌府尹)에 임명된 그는 단종(端宗) 즉위 후인 그해 6월 황해도 지역에 창궐했던 전염병 방제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으며,(『단종실록』 즉위년 6월 28일) 이어 왕실 의료를 담당하는 의원의 시취와 약재 운용에 대해서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단종실록』즉위년 12월 25일) 1453년(단종 2) 겨울 서울에서 사망한 것으로 전하니, 당시 그의 나이 65세였다.
성품과 일화
이선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현재 이선제의 부조묘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만산마을에 있다. 이곳에는 광주광역시기념물 제24호로 지정된 600여 년의 왕버들 노거수가 있는데 이 나무를 이선제가 심었다고 전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이 과거에 급제하면 이 나무에 북을 걸어놓고 잔치를 벌였다고 하여 괘고정수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또한 조선 초기 무진군으로 강등되었던 광주를 광주목으로 승격시키는데 공을 세웠으며, 광주 지역 인재발굴을 위하여 젊은 선비들을 뽑아 강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묘소와 후손
묘소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535-1에 있다. 무덤 주변으로는 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된 이선제 부조묘가 있고, 500여 미터 떨어진 곳에는 신도비가 있다.
부인 보성 선씨(寶城宣氏)는 고려 말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낸 선윤지(宣允祉)의 딸로, 자녀는 5남 1녀를 두었다. 1남 이시원(李始元)과 5남 이형원(李亨元)이 문과에 급제하며 이름을 남겼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광주문화관광포털 https://utour.gwangju.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