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묘(懿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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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成宗)의 생부인 덕종(德宗)의 묘호(廟號) 또는 그를 모신 사당.

개설

조선의 제9대 왕인 성종의 생부이며 세조(世祖)의 아들인 의경세자(懿敬世子)를 의경왕(懿敬王)으로 추숭하고 1471년(성종 2)에 정한 묘호(廟號)이다. 처음의 이름은 의경묘(懿敬廟)였다.

연원 및 변천

의경세자는 처음에 의경왕(懿敬王)이라 했다가 다시 추존(追尊)하여 시호(諡號)를 온문의경왕(溫文懿敬王)이라 했다. 그의 묘호는 처음에 의경묘(懿敬廟)라 칭하였으나 다시 의묘(懿廟)로 정해졌다.(『성종실록』 2년 12월 22일) 의묘는 연경궁(延慶宮)의 후원에 세우고 연경궁은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에게 주도록 하였다.(『성종실록』 3년 12월 2일) 의경묘가 완성된 것은 1473년(성종 4)의 일로서 여기에 의경왕의 신주와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월산대군 이정이 제사를 받들어 올렸다.(『성종실록』 4년 9월 20일)

의묘 조성의 도제도는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 제조는 행상호군(行上護軍) 김개(金漑), 전의군(全義君) 이덕량(李德良), 의묘 조성 낭청(懿廟造成郞廳)은 행부호군(行副護軍) 김작(金碏), 행부사직(行副司直) 윤해(尹垓)ㆍ남칭(南偁)ㆍ이계정(李繼楨) 등이었다. 성종은 월산대군 이정이 의묘를 봉사(封祀)하고 있다는 이유에서 그 아들에게 흥록대부(興祿大夫), 손자에게는 가덕대부(嘉德大夫), 증손에게는 승헌대부(承憲大夫), 현손 이하는 정의대부(正義大夫)를 제수하도록 하였다.

절차 및 내용

의경세자를 온문의경왕으로 추존할 때에는 성종이 면복(冕服)을 갖추고 백관들을 거느리고 인정전(仁政殿)의 뜰에 나아가 영성부원군 최항(崔恒)을 보내 옥책(玉冊)을 의경묘에 올렸다. 또 영의정 윤자운(尹子雲)을 보내 금보(金寶)를 의경묘에 올리도록 하고 향례(享禮)를 행하였다.(『성종실록』 3년 1월 24일)

의묘 제향을 지낼 때 처음에는 땅에 울창주를 붓는 관례(祼禮)를 행하지 않았지만 이와 같은 방식이 옳지 않다 하여 1473년 9월의 제사부터 관례를 행하는 것으로 정했다.(『성종실록』 4년 9월 7일)

1473년(성종 4)에는 성종이 익선관과 곤룡포를 갖추어 입고 의경묘에 제사지냈는데, 음악은 고취(鼓吹)를 쓰고 희생(犧牲)은 대뢰(大牢)를 썼다. 제사를 지낸 후에는 월산대군 이정의 집에서 음복연(飮福宴)을 행하였다.(『성종실록』 4년 11월 1일)

1475년(성종 6)에는 예조의 청에 따라 의묘에 분황제(焚黃祭)를 지내도록 했으며,(『성종실록』 6년 1월 23일) 의묘의 분황제에 쓰는 희생은 대뢰를 쓰도록 하였다.(『성종실록』 6년 2월 3일) 덕종의 시책(諡冊)은 1475년(성종 6) 2월에 올렸는데 성종이 면복을 입고 인정전의 계단 위에 나아가 올렸다. 이때의 초헌관은 월산대군 이정이, 아헌관은 인산부원군 홍윤성(洪允成)이, 종헌관은 하성부원군 정현조(鄭顯祖)가 담당하였다.

의묘에 제향을 올릴 때의 음악은 계상(階上)에 편성되어 등가(登歌)헌가(軒架)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악대로만 연주하였다. 왕이 친히 올리는 친향의묘의(親享懿廟儀) 때에는 영신(迎神)ㆍ초헌ㆍ아헌ㆍ종헌ㆍ송신례 절차에서 음악을 연주했는데, 가야금ㆍ거문고ㆍ당비파ㆍ향비파ㆍ노래ㆍ방향(方響)ㆍ해금ㆍ대금ㆍ퉁소ㆍ교방고ㆍ장고ㆍ피리ㆍ당적(唐笛) 등의 악기를 편성하여 제례악을 연주하였다.

참고문헌

  • 『國朝五禮儀』 『國朝五禮序例』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