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무증(兪懋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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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0년(선조 13)∼1659년(효종 10) = 80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효종(孝宗) 때의 문신. 안협현감(安峽縣監)과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 등을 지냈다. 자는 여성(汝省)이다. 본관은 기계(杞溪)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청풍군수(淸風郡守)유대술(兪大述)이며,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별제(別提)홍반(洪磻)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지낸 기성부원군(杞城府院君)유홍(兪泓)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유관(兪綰)이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34년(인조 12) 충의위(忠義衛)에 속하여 있다가 동반(東班)으로 서용되었다.[『인조실록기(仁祖實錄)』인조 12년 7월 24일] 1635년(인조 13) 음보(蔭補)로 관직에 나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후릉참봉(行厚陵參奉)이 되었는데, 이때 나이가 56세였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3년 2월 19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거가(車駕)를 호종하였다.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난 후 인조가 환궁하자 선릉참봉(宣陵參奉)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뒤 참관(參官)으로 옮겼고, 이어 활인서(活人署)별제(別提)가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가 안협현감을 지냈다. 1646년(인조 24) 9월에 신구(新舊) 공신 및 그 자손들이 모여 행한 공신회맹(功臣會盟)에 할아버지 유홍의 자손으로 참여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인조실록』인조 24년 9월 3일, 인조 24년 9월 9일, 『시남집(市南集)』 권23 「기안군유공묘갈명(杞安君兪公墓碣銘)」 이하 「유무증묘갈명」] 그리고 1647년(인조 25)에 중추부 첨지사에 제수되었다.[「유무증묘갈명」]

1658년(효종 9)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기안군(杞安君)에 봉해졌다. 1659년(효종 10) 12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80세였다.[「유무증묘갈명」]

성품과 일화

유무증(兪懋曾)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과거를 거치지 않았고 크게 입신양명을 하지도 못하였으나 명문가의 후손으로 효도와 우애가 뛰어났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가문의 화목함을 꼽았다. 또 어버이가 작고한 뒤에는 차마 그분들이 좋아하던 음식을 먹지 못하였고, 집안의 난처한 일을 처리하는 데는 온 정성을 다하였다. 종족(宗族)과 화목하고, 향당(鄕黨)과는 화합하였다.[「유무증묘갈명」]

묘소와 후손

유무증의 묘소는 경기도 하남시 하산곡동에 있는데, 부인 신평 이씨(新平李氏)와 합장되어 있다. 묘갈은 1663년(현종 4년)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비문은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유계(兪棨)가 글을 짓고,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민정중(閔鼎重)이 글씨를 썼다.

부인 신평 이씨는 참봉(參奉)이창(李昌)의 딸인데, 5남 4녀를 낳았다. 1남은 유식(兪植)이고, 2남은 유상(兪相)이며, 3남은 유겁(兪极)이다. 4남은 유습(兪槢)이고, 5남은 유후(兪◎木+厚)이다. 그리고 1녀는 정우익(鄭友益)에게, 2녀는 김극관(金克寬)에게, 3녀는 이한익(李漢翊)에게, 4녀는 이수창(李壽昌)에게 각각 시집갔다.[「유무증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시남집(市南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