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두(流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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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고유의 속절인 음력 유월 보름날.

개설

유두(流頭)는 한가위 추석과 함께 우리나라 고유의 속절(俗節)이다. 이날의 모임을 유두회(流頭會)라고 하며, 술 마시는 것을 유두음(流頭飮)이라고 한다. 유두는 신라 때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고려 때도 이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풍속을 이어받아 유두를 속절로 삼았다. 그러나 왕실에서는 유두절(流頭節) 행사 규모를 축소하였고 민간에서도 사명일(四名日), 즉 정조(正朝)·한식·단오·추석 등이 강조되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연원 및 변천

홍석모(洪錫謨)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서 고려명종 때의 학자 김극기(金克己)가 쓴 『김거사집(金居士集)』을 인용하여 유두의 연원을 설명하였다. “경주의 옛 풍속에 6월 보름날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들을 씻어 버리고 그 자리에서 계제(禊祭), 즉 재앙을 물리치는 제를 지내고 술을 마시는데, 이것을 유두연(流頭宴)이라고 한다.” 이보다 전에 나온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도 같은 대목이 인용되어 있는데, 강물에서 피서(避暑)하며 마시던 술이 잘못 전하여 액막이술이 된 것 같다는 해설을 달았다.

『고려사(高麗史)』에 1185년(고려 명종 15) 6월 15일 유두일에 시어사(侍御史) 두 명과 환관 최동수(崔東秀)가 광진사(廣眞寺)에 모여 술을 마셨는데, 이를 유두음이라고 하였다. 이색(李穡)의 『목은시고(牧隱詩藁)』에는 유두회를 갖고 이에 대해 읊은 시가 있다.

1423년(세종 5)에는 인일(人日)·단오·유두 등의 날에 각전(各殿)에 올린 잡물(雜物)을 없애라는 왕의 명이 있었다(『세종실록』 5년 1월 5일). 그러나 왕실 제사에서 유두 제사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일성록』에는 1786년(정조 10) 7월 20일에 선혜청당상서유린(徐有隣)이 내제전(內祭奠)의 제수(祭需) 마련과 관련하여 유두가 정조·상원·추석 등과 같은 명일(名日)로서 제전(祭奠)이 이루어졌다고 하였고, 왕의 하교에도 불구하고 위의 명일에 삼짇날·단오·칠석·중양·납일, 그리고 동지까지 포함시켰다.

조선중기까지 사대부들이 행한 절사(節祀) 중에는 유두일에 지내는 속절 제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초파일을 민중들과 마찬가지로 속절로 인정한 반면 유독 유두천신(流頭薦新)은 시기가 내려오면서 속절 제사에서 제외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헌종 때의 인물인 정학유(丁學游)가 쓴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유월령(六月令)에도 유두가 나오지만 실제 이날 유두 행사가 있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성호이익(李瀷)은 유두절을 고려 풍속으로 여겼다.

절차 및 내용

유두절에는 수박·참외 등이 새로 수확되므로 국수·떡 등과 함께 사당에 올리는 ‘유두천신’의 제사를 지냈다. 속절 제사에는 각기 그 절기에 맞는 제찬(祭饌)이 올라간다. 상원에는 약반(藥飯: 약밥), 삼월 삼짇날에는 애병(艾餠: 쑥떡), 등석(燈夕: 사월 초파일)에는 송병(松餠: 송편), 유두에는 수단(水團: 경단), 칠월 칠석에는 상화(霜花: 기장떡), 구월 중구에는 인병(引餠: 인절미) 등이다. 멥쌀가루를 쪄서 둥글고 긴 가래떡을 만든 다음 그것을 구슬같이 잘게 썰어 꿀물에 담갔다가 얼음을 채운 것을 수단이라고 한다. 중구일에 국화주를 제주(祭酒)로 쓰듯이 유두일에 쓰는 제주는 소주이다.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슬 모양의 누룩을 만드는데, 이것을 유두누룩[流頭麯]이라고 한다. 거기에다 오색 물감을 들여 3개를 이어서 색실로 꿰어 차고 다니며, 혹 문 위에 걸어 액을 막기도 한다. 유두날의 시절음식으로는 상화병(霜花餠)이라고 하여 밀가루를 반죽하여 꿀에 버무린 콩이나 깨를 그 속에 넣어 찐 떡이 있고, 밀가루를 반죽하여 기름에 지진 다음 고미로 만든 소를 넣거나 콩과 깨에 꿀을 섞은 소를 넣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오므려 만든 연병(連餠)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일성록(日省錄)』
  •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목은시고(牧隱詩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