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성(獄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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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형사사건에서 범죄인을 신문하여 죄를 확정짓는 것.

내용

조선시대에는 형사재판을 옥송(獄訟)이라고 했는데, 이는 자백(自白)을 얻어 형벌을 부과하는 규문주의(糾問主義)를 바탕으로 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당시의 형사 절차는 범죄 사안에 대한 피해자의 고소(告訴)가 있거나 관사(官司)에서 사건의 발생을 인지한 경우에 범인을 잡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 후 태죄(笞罪)에 해당하면 즉시 재판을 진행하고 장형(杖刑) 이상에 해당하면 우선 수금(囚禁)하게 되며 이후에 고문(拷問)이 수반된 신문(訊問)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신문을 통해 얻은 자백, 증거(證據) 등을 심리한 결과 해당하는 죄를 확정짓게 되는데 이것을 옥성(獄成)이라고 하였다. 옥성에 대한 설명은 『당률소의(唐律疏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명례률(名例律)」 제명조(除名條)의 주석(註釋)에는, 옥성이란 장물(贓物)과 진상이 드러나 증명된 경우나, 형부(刑部)의 상서성(尙書省)에서 판결하였으나 아직 왕에게 보고하지 않은 경우[獄成謂贓狀露驗及尙書省斷訖未奏者]가 해당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범죄자를 신문해서 자복시켜 죄를 확정짓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예외가 있었다. 이 예외에 관해서는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대명률』에 규정이 보인다. 『대명률』 「명례율(名例律)」 사발재도조(事發在逃條)에는 만약 범죄자가 도망친 경우에 증거가 명백하다면 죄가 이미 확정된 것으로 보아 신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정하였다.

1404년(태종 4)에는 간음죄(姦淫罪)로 고소된 자를 전법사(典法司)에서 잡아들여 국문(鞠問)하려 했는데, 범죄자가 도망치자 그 죄가 확정된 것으로 보고 죄안(罪案)에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에도 사헌부(司憲府)의 건의에 따라 도망간 자가 사직(社稷)에 관계된 중죄(重罪)를 범한 경우가 아니라면 굳이 가족 등을 오래 잡아두어 신문하지 말고, 범인이 결국 나타나지 않으면 죄를 확정하여 문안(文案)을 작성해 두었다가, 범인이 나타나면 집행하기로 하였다.

1422년(세종 4)에는 타인의 무고(誣告)를 받은 자가 신문에 자복(自服)하자 사헌부(司憲府)에서 죄가 확정되었다고 왕에게 보고하였으나, 결국 진술한 바가 의심스럽고 고발한 자와 대질(對質)도 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어 풀려났다. 1539년(중종 34)에는 범죄 사실이 아무리 명백하다고 하더라도 죄인이 자복하지 않고 죽은 경우에는 죄가 확정된 것으로 단정하지 않도록 했다. 1779년(정조 3)에는 죄가 확정되어 사형에 처해질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딸이 정소(呈訴)한 것이 받아들여져서, 왕의 특명으로 사형을 감하고 유배(流配)한 사례가 있다.

용례

僧宗惠烝其義母 事覺 係水原府 獄成 議政府議以爲 當依法科罪 右參贊金國光獨曰 宜拿來覈訊 然後定罪 上從國光議(『세조실록』 13년 8월 2일)

참고문헌

  •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
  • 김택민·임대희 역, 『역주 당률소의(唐律疏議)』명례편, 한국법제연구원,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