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군문(五營軍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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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오영군문 |
한글표제 | 오영군문 |
한자표제 | 五營軍門 |
동의어 | 오군영(五軍營), 오영문(五營門) |
관련어 | 삼군문(三軍門),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숙종~고종 |
집필자 | 윤훈표 |
폐지 시기 | 고종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오영군문(五營軍門) |
조선후기에 국왕의 시위와 수도 방위를 담당하였던 다섯의 중앙 군영(軍營).
개설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금위영(禁衛營)·총융청(摠戎廳)·수어청(守禦廳)으로 이루어졌으며, 오군영(五軍營)·오영문(五營門)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의 오위제(五衛制)에 기초해서 운영되었던 병력으로는 조총(鳥銃)을 앞세운 일본군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효과적 저지를 위한 새로운 전술과 무장을 갖춘 부대의 창설이 시급했다. 이것을 위해 1593년(선조 26)에 훈련도감을 처음으로 설립하였다. 이것이 오영군문의 시작이었다.
반정(反正)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차지하였던 인조 정권은 대륙 정세의 변화뿐만 아니라 국내 반대세력의 저항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했다. 이로 인해 도성과 변방에 대한 방비의 강화가 시급하였다. 반정 공신의 핵심이었던 이귀(李貴)가 1624년(인조 2)에 어영사(御營使)에 제수된 것을 계기로 스스로 모집했던 정예병 260여 명을 거느리면서 국왕의 호위에 임하였는데, 이것이 어영청 설치의 시초가 되었다.
효종대에 북벌 계획의 수립에 따른 군액의 확장과 군영의 증가 등으로 인해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궁핍한 국가 재정과 극심한 양역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군제변통(軍制變通)·양역변통(良役變通)의 논의가 그 절정에 달했던 1682년(숙종 8)에 정초군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금위영을 설치하였다.
반정으로 광해군을 퇴위시키고 집권하였던 인조 정권은 후금(後金)에 대한 강경책을 추구하였다. 더불어 수도 및 그 외곽인 경기도 일대의 방어력을 튼튼히 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려 했다. 일단 경기도 일대의 속오군(束伍軍)을 중심으로 총융군(摠戎軍)을 편성하여 국왕의 호위를 강화했다. 반정 공신인 이서(李曙)가 1624년(인조 2)에 기보총융사(畿輔摠戎使)에 임명된 것을 계기로 총융청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인조대에 내외의 사정으로 인하여 군사력 강화와 방어 시설에 대한 개축을 서둘렀다. 그중의 하나였던 남한산성에 대한 개축이 완료되었던 1626년에 수어청이 설치되었다. 특히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크게 확충되면서 마침내 그 독자성이 인정되었다.
1682년에 금위영이 설치되면서 드디어 오영군문이 모두 갖추어졌다. 이로써 국왕의 시위와 수도 및 그 외곽 지역에 대한 방위체제가 확립되었다. 설립 이후 재정 문제라든가 당쟁의 격화 등에 따른 정치권력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몇 차례 부분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기본 골격에 있어서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이로 인해 조선후기의 중앙 군제는 곧 오영군문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영군문은 1881년 고종이 친정 체제를 확고히 하고 근대적인 방식으로 훈련된 군대를 육성하고자 군제 개혁을 추진하면서 양영체제로 개편되었다. 그 뒤 임오군란 등의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일시적으로 복구되기도 하였으나 곧바로 혁파되었다. 총융청과 수어청의 경우도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폐지되는 과정을 밟았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조총을 활용한 전술에 크게 당황하였던 조선 정부는 그것을 제압하고자 포수의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1593년에 훈련도감을 설립하였다. 명나라 장수로 왜구 소탕에 큰 성과를 거둔 척계광이 쓴 『기효신서』의 군사편제와 전법을 채택하였다. 특히 속오법(束伍法)의 실시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창설 당시에는 포수로만 구성되었는데 『기효신서』의 삼수기법에 따라 살수, 사수도 첨가하였다.
한편 청나라에 대비하기 위해 마병을 증설하였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국출신(局出身)을 만들었다. 설립 당시에는 모집 등의 방식으로 군인들을 충원하였으나 질이 떨어지자 승호제를 채택해서 식년마다 지방에 군액을 할당하여 의무적으로 채우도록 했다. 만약 부족할 경우에는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는 별승호(別陞戶)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각 지방에서 징발되어 올라와서 근무하였던 군사에게 급료라든가 보포(保布) 등을 지급해서 생계를 유지하도록 했다.
국왕을 시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임무였으며, 도성 내 도적의 방비와 체포, 화재 방지 등의 일에도 종사했으며, 수도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도성이나 북한산성의 수축과 관리도 담당하였다. 상황에 따라서는 국경 수비를 위해 부방(赴防)의 임무까지도 감당해야 했다. 지방군의 훈련에도 관계했으며 호랑이 사냥 따위의 대민 업무에도 참여하였다.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에 성공하였던 인조 정권은 우선 국내의 반대파들을 제압하는 것과 함께 후금의 거세지는 압력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군사력의 강화를 서둘렀다. 특히 전과 달리 후금에 대한 강경책을 주장하면서 친정(親征)까지 계획하였다. 이 계획의 실천을 위해 반정 공신의 핵심이었던 이귀가 모집하였던 정예병 260여 명을 기반으로 새로운 군영을 설치하였다. 1624년 이귀가 어영사에 임명되어 정식으로 이들을 거느리며 왕권을 수호했던 것이 어영청의 시초가 되었다.
이괄의 난을 계기로 병력이 증강되었지만 여전히 총융청에 소속되었다. 마침내 1627년경부터 어영청으로 독립되었으며, 1652년 북벌 계획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이완을 어영대장에 제수하는 것을 계기로 확대·개편하였다. 안으로는 왕권 수호의 정예군으로, 밖으로는 북벌의 선봉군으로 삼고자 했다.
효종대에 북벌 계획의 수립에 따른 군액의 확장과 군영의 증가 등으로 인해 궁핍해진 국가 재정과 양역의 극심한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변통 논의가 절정에 달했던 1682년에 정초군과 훈련별대를 통합하여 금위영을 설치하였다. 정초군은 인조대에 병조 소속의 각 번 기병 가운데 우수한 자를 뽑아서 조직하였다. 병조에 직속되어 특히 숙위 근무에 투입되었다. 훈련별대는 급료병으로 구성되어 국가 재정에 커다란 부담을 주었던 훈련도감을 대체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처음부터 독립된 군영으로 자리 잡았던 것은 아니었으며, 병조 판서가 대장직을 겸함으로서 실질적으로 병조의 수중에 있게 되었다. 1754년(영조 30)에 별도로 대장을 설치하여 독립된 군영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숙위와 수도 방어에서 중요한 군영으로 성장하였다.
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하자 곧바로 후금에 대한 강경책을 펼쳤던 인조 정권은 서울과 그 외곽인 경기도 일대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려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일어났던 이괄의 난으로 임금이 공주로 피신하는 사태에 직면하자 조속하게 서둘러 마련하였다. 그 하나로 경기도 일대의 속오군을 중심으로 총융군을 편성하여 국왕을 호위하였다. 그 당시 경기감사였던 이서를 1624년에 기보총융사에 임명함으로써 정식으로 설립하였다.
그리고 1747년에 그동안 북한산성을 관할하던 경리청을 폐지하고 북한관성장(北漢管城將) 이하를 휘하에 소속시켰다. 1750년 재정 부담이 크다는 이유로 총융사를 경기병사가 겸하고 본청을 북한산성에 출진하게 했으나 1760년에 도로 환원시켰다. 이로써 도성 및 그 북방 지역에 대한 방위를 책임지게 되었다.
인조 정권하에서 도성 외곽의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해 실시하였던 남한산성의 개축 작업이 완료된 해인 1626년에 수어청이 세워졌다. 처음에는 축성을 주도했던 총융사의 직권 아래 놓여 있었으나 정묘호란이 끝난 뒤 다시 정비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1632년경에 별도의 수어사가 임명되기 시작했으며, 아울러 별장도 제수되면서 수어사-별장 체제가 갖추어졌다. 이것을 계기로 광주부에서 분리되었으나 여전히 총융사의 통솔을 받다가 1634년에 이르러 그 독자성이 인정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 명실상부한 군영체제가 갖추어졌다.
초창기에는 훈척중신(勳戚重臣)을 책임자로 임명하고 서울에 경청을 두고서 산성을 관할하는 이원체제(二元體制)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양자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서 서울의 경청이 광주부로 나아가 통솔하는 일원체제가 채택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또다시 이원체제로 환원하는 등의 조치가 몇 차례 반복되었다. 이는 도성의 방위에 주력해야 할 것인가 남한산성의 관리에 역점을 둘 것인가의 견해 차이에서 발생하였다.
조직 및 담당 직무
설립 초기에는 대장(大將) 아래 사(司)-초(哨)-기(旗)-대(隊)-오(伍)로 조직을 편성하여 각각 파총(把摠)-초관(哨官)-기총(旗摠)-대장(隊長)으로 하여금 통솔하게 했다. 이는 『기효신서』의 속오법에 영향을 받아서 마련된 것으로 그 이후 많은 군영의 편성에 영향을 주었다.
최고 지휘부에는 의정(議政)이 겸하는 도제조(都提調), 병조 판서와 호조 판서가 겸하는 제조(提調)를 중심으로 대장, 중군(中軍), 별장(別將), 천총, 국별장(局別將), 파총, 종사관(從事官), 초관이 있었다. 도제조는 훈련대장 유고 시에는 대신 지휘를 맡으며, 제조와 함께 훈련도감 운영의 전반을 감독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훈련대장은 실질적인 지휘권과 도감 장관(將官)의 인사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정치적 비중이 상당하였다.
그 아래에 군관(軍官), 별군관(別軍官), 지구관(知彀官), 기패관(旗牌官), 권무군관(勸武軍官), 도제조군관(都提調軍官), 감관(監官)과 약방(藥房)·침의(鍼醫)·마의(馬醫) 등의 군사훈련이나 도감의 각종 행정에 종사하는 상층 군관들이 있었다.
병력은 포수, 살수, 사수 등의 삼수병이 주력을 이루었으며 그중에서도 포수의 수가 가장 많았다. 정원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대개 급료병(給料兵)으로 장번(長番)으로 근무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 이외에 잡역을 담당하였던 각색 표하군(標下軍)이 있었는데 그 군액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변천
설립 이후 재정 문제라든가 당쟁의 격화 등에 따른 정치권력의 변동으로 말미암아 몇 차례 부분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특히 1703년 양역이정청(良役釐整廳)의 개혁에 의해 금위영과 어영청은 모두 5부 25사 체제로 동일하게 바뀌면서 훈련도감을 중앙에 두고 양익(兩翼) 체제를 갖춘 삼군문 체제가 되었다. 아울러 총융청과 수어청은 3영으로 통일되어 재편되었다. 그러나 그 기본 골격에 있어서는 커다란 변화가 없었다.
그런데 1881년 고종이 친정 체제를 확고히 하고 근대적인 방식으로 훈련된 군대를 육성하고자 군제개혁을 추진하면서 대폭적으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해 11월 오영군문을 통합하여 양영체제로 개편하라는 명령에 따라 훈련도감·용호영(龍虎營)·호위청(扈衛廳) 등을 합하여 무위영(武衛營)으로 하고 어영청·금위영 등을 합하여 장어영(壯禦營)으로 하였다. 그 뒤 임오군란 등의 정치적 격변을 거치면서 일시적으로 복구되기도 하였으나 곧바로 혁파되었다. 총융청과 수어청의 경우도 1894년 갑오개혁에 이르기까지 폐지되는 과정을 겪었다. 이로써 오영군문은 사라졌으며 그것을 대신하는 새로운 근대적 군제가 수립되었다.
의의
조선후기의 중앙 군제는 곧 오영군문체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왕의 시위와 수도 방위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조직 체계와 운영 방식이 곧 조선후기 군제의 구조와 성격을 대변하는 것으로 일컬어졌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만기요람(萬機要覽)』
- 金鍾洙, 『朝鮮後期 中央軍制硏究』, 혜안,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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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효식, 『조선후기 군제사연구』, 신서원, 1995.
- 吳宗祿, 「중앙군영의 변동과 정치적 기능」, 『조선정치사 1800~1863㈛』, 청년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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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崔孝軾, 「御營廳·禁衛營의 比較硏究 - 주로 由來 組織 編制를 中心으로」, 『慶州史學』1, 1982.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