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군영(五軍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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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오군영 |
한글표제 | 오군영 |
한자표제 | 五軍營 |
동의어 | 오군문(五軍門), 오영문(五營門), 오영(五營) |
관련어 | 훈련도감(訓鍊都監),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어영청(御營廳), 금위영(禁衛營)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후기 |
집필자 | 오종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오군영(五軍營) |
조선후기에 수도와 그 일대를 방어하기 위해 설치한 5개의 군영(軍營).
개설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를 거치는 동안 설치한 다섯 군영, 즉 훈련도감(訓鍊都監), 어영청(御營廳),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금위영(禁衛營)을 통틀어 오군영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전기의 핵심 군사 기구인 오위(五衛)는 16세기에 이르러 소속 병종(兵種)의 대부분이 군적(軍籍)에 이름을 올린 군인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 군인이 준 포(布)를 받고 대신 근무하는 수포대립제(收布代立制)가 성행함에 따라 차츰 허구화되고 말았다. 그 결과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중앙군의 주요 병종을 동원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였다. 여기에 더해 수도의 방위 체제가 무너진 데 대한 반성으로 도성과 수도 주변의 방어를 강화할 목적으로 오위에 속한 주요 병종을 대체하는 새로운 군사 조직을 갖추었는데, 그것이 오군영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 중앙군의 선구를 이룬 훈련도감은 1593년(선조 26) 당시 조선의 군사 업무를 총괄하고 있던 유성룡(柳成龍)의 강력한 건의에 따라, 명(明)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이 왜구를 물리칠 때 효과를 본 병법을 정리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내용을 조선 군사들에게 훈련할 목적으로 설치되었다. 이때 훈련도감의 군인으로 조직된 사람들은 서울의 빈민이 주축을 이루었고, 노비 신분의 병사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문제는 신분 질서에 대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 세력으로부터 비판을 받는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총융청은 1624년(인조 2)에 일어난 이괄(李适)의 난을 계기로, 경기도 북부 지역의 방어를 강화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그에 따라 주로 경기도의 군인들로 조직되었는데, 훈련도감과 마찬가지로 조총을 사용하는 군인이 핵심을 이루었다.
수어청은 1626년(인조 4)에 남한산성을 고쳐 쌓고 이를 중심으로 경기도 남부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 위하여, 역시 경기도의 군인들을 주축으로 설립되었다.
어영청은 1623년(인조 1)에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어융사(御戎使)이귀(李貴)가 모집한 정예 병력 260여 명이 모태가 되었다. 이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 인조가 공주로 피난을 갔을 때 모은 600여 명의 포수에게 왕의 호위 임무를 부여하여 어영군(御營軍)이라 한 데서 유래하였는데, 어영군이 중앙 군영의 체제를 갖춘 것은 인조 말엽부터 효종대에 이르는 동안으로 추정된다.
금위영은 1682년(숙종 8)에 왕의 호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병조에 소속되어 있던 정초청(精抄廳)의 병력과 훈련도감의 훈련별대(訓鍊別隊)를 합쳐 여기에 배속하였다.
조직 및 기능
오군영은 각기 구체적인 조직과 직무의 내용이 달랐으나, 전반적으로 『기효신서』의 속오(束伍) 편제에 따라 편성되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훈련도감은 급료를 받는 병력을 중심으로 편제되었다. 그에 비해 다른 4개의 군영은 군역의 의무에 따라 복무하는 향군(鄕軍)이 주축을 이루었고, 급료를 받는 병력은 소수였다. 또 훈련도감은 사수(射手)와 포수(砲手), 살수(殺手)의 삼수병으로 구성되었는데, 다른 군영이 생겨날 때까지 기능을 대부분 상실한 오위를 대신하여 왕의 호위와 도성의 방어를 전담하였다.
오군영 체제가 완성되었을 때 훈련도감과 더불어 도성의 방어를 담당한 것은 어영청과 금위영이었다. 나머지 두 군영인 총융청과 수어청은 도성 외곽의 북부와 남부를 각각 방어하는 것이 주된 기능이었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도성의 방어가 더욱 중요시되면서 오군영이 도성과 수도를 분담하여 방어하는 체제가 갖추어졌다.
변천
오군영은 정조 연간에 장용영이 설치되어 국왕의 친위부대로 역할하면서 그 위상이 약화되었다가 정조 사후에 장용영이 혁파되면서 다시 그 역할이 강화되었다. 1881년(고종 18) 무위소(武衛所)에서 이름이 바뀐 무위영(武衛營)과 새로 설치된 장어영(壯禦營)에 나뉘어 소속되면서 소멸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설치되었다가, 1884년(고종 21) 중앙군제가 친군(親軍) 5영으로 개편됨으로써 마침내 소멸하였다.
참고문헌
- 김종수, 『조선후기 중앙군제연구 - 훈련도감의 설립과 사회변동』, 혜안, 2003.
- 배항섭, 『19세기 조선의 군사제도 연구』, 국학자료원, 2002.
-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 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95.
- 최효식, 『조선후기 군제사연구』, 신서원, 1995.
- 오종록, 「조선후기 수도방위체제에 대한 일고찰 - 오군영의 삼수병제와 수성전」, 『사총』33,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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