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악전(靈幄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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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릉에서 왕 혹은 왕후의 재궁을 땅에 묻기 전까지 봉안하는 건물.

개설

왕실의 국장(國葬) 의례에서는 각 의례의 단계별 성격에 따라 중심 공간을 별도로 구성하였다. 왕실의 국상이 발생하면 우선 승하한 전각에서 3일째에 소렴(小殮)을 행하고, 5일이 되면 대렴을 하여 시신의 사후 처리가 이루어진다. 그동안 궁궐의 적당한 전각을 선정하여 빈전을 꾸민다. 빈전에서는 곡(哭)이 행해진다. 곡이란, 시신의 사후 처리가 완료된 다음 이를 담은 관을 모시고 살아 있을 때와 같이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 곡을 할 때마다 슬픔을 나타내는 이 기간은 5개월 정도 되며 그동안 산릉을 조성한다.

산릉에 시신을 매장하기 위해 빈전에서 발인하여 산릉에 도착하면 바로 장례를 지내지 않고 좋은 날을 기다려 의례를 행한다. 그동안 시신을 담은 재궁은 산릉에 미리 조성해 둔 영악전에 봉안하게 된다. 그러나 영악전은 산릉 주변뿐만 아니라 산릉으로 가는 길에 조성되기도 하였다. 궁궐에서 재궁을 발인하여 산릉으로 향할 때 국장 행렬 중 잠시 쉬어가는 주정소(晝停所)에서 재궁을 봉안하기 위해 조성되기도 하였다.

산릉에서 이루어지는 상장례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재궁이 산릉에 도착하여 봉분에 안치될 때까지의 국장(國葬) 과정이며, 두 번째는 봉분을 형성하고 정자각에 신어평상(神御平床)을 놓고 3년 동안 상례를 행하는 것이다. 국장 과정에는 시신을 담고 있는 재궁이 의례의 대상이 되며, 국장이 끝나면 신주에 모셔진 혼(魂)이 의례 중심이 된다. 영악전은 국장 과정에서 중심 건물이 되며 정자각은 3년 상례를 행하는 동안 중심 건물이 된다.

국장 의례가 이루어지는 동안 영악전은 중심 건물이 되어 그 주변으로 유문(帷門)을 둘렀는데, 시선을 차단하고 의례의 경계를 형성하기 위해서이다. 이때 유문에 휘장을 설치하고 각 방향에 문을 설치하였다. 영악전의 위치는 봉분의 남쪽에 위치하고 영악전을 둘러싼 서쪽으로는 우주(虞主)를 쓰는 길유궁(吉帷宮)이 위치한다.

재궁을 실은 대여(大輿)가 산릉에 도착하면 유문 밖에서 재궁을 내려 영악전으로 가져가고 재궁은 남쪽에 머리가 놓이도록 안치된다. 빈전에서와 같이 재궁이 놓인 찬궁(欑宮) 동쪽에 영침(靈寢)을 놓고 찬궁 남쪽에 영좌(靈座)를 놓으며 영좌 남쪽에 제사상(祭祀床)을 배치한다. 이러한 과정은 모두 빈전과 같이 성빈(成殯) 의례에 따라 행한다.

영악전에 재궁을 모실 때는 빈전에서와 같이 아침저녁으로 식사를 올리는 조석상식의(朝夕上食儀)가 행해진다. 동이 트면 조곡(朝哭)을 하고 해가 지고 일과를 마칠 때 석곡(夕哭)을 행하여 슬픔을 나타낸다. 조선중기 이후에는 주다례(晝茶禮)가 행해지기도 하였다. 국장을 행하는 날은 영악전에서 재궁을 모셔 현궁(玄宮)으로 가기 전에 천전의(遷奠儀)를 행한다. 현궁은 무덤 안의 석실 혹은 회곽으로 조성된 공간이다. 재궁이 능으로 들어가면 영악전의 역할을 끝난다.

영악전이 사용되는 기간은 산릉에 재궁이 도착한 날부터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재궁이 능으로 들어갈 때까지이므로, 실제 날수로는, 짧게는 하루·이틀이며 길게는 열흘 정도 된다. 따라서 짧은 기간 사용하므로 기초 공사를 튼튼히 하지 않았다. 철거가 편리하도록 초석이나 기와를 사용하지 않은 임시 건물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내부에 재궁을 봉안해야 하므로 그 규모는 정자각보다 크며 건물의 위계도 높고 중요했다.

산릉으로 가는 길에서 주정소에 설치하는 영악전은 대부분 천막을 이용하여 조성하였다. 동구릉이나 서오릉은 하루에 도달할 만한 가까운 거리이므로 영악전을 설치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1674년(현종 15)에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산릉을 조성할 때에는 산릉의 위치가 여주라서 도성에서 3일 이상 소요되었으며, 또 한강을 건너야 하므로 한강 건너편에 영악전을 조성하였다(『현종실록』 15년 4월 9일). 이때에는 국장도감(國葬都監) 당상(當相)김만기(金萬基)가 상량하는 것을 감독하고 왕에게 보고한 것으로 보아, 주정소의 영악전이더라도 목조 건물로 조성한 듯하다(『현종실록』 15년 5월 4일).

내용 및 특징

산릉에서 국장 의례가 진행되는 동안 필요한 공간은 임시 건물로 조성된다. 영악전은 국장 의례의 중심 건물이지만, 임시 건물로 지었다. 초석을 놓지 않고 기둥을 땅에 박아 세우는 굴립주 형식이며, 지붕은 초둔을 이용하여 덮었다. 평면은 정자형(丁字形)을 기본으로 하여 정전 3칸, 배위청 2칸으로 구성되었다. 정전의 공간 규모는 30자 정도의 대들보를 사용하고 기둥의 높이는 12자 정도 된다. 정전의 정면 어간과 협간에는 모두 분합문을 달았고 북쪽 벽면 중앙에 신문(神門)을 설치하였으며 분합문을 달았다. 건물의 전체 형태는 초석을 사용하지 않고 초가지붕을 사용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정자각과 유사하며, 내부 공간 규모는 오히려 정자각보다 넓게 지었다.

내부에는 신문 가까이에 재궁을 넣어 두는 찬궁을 설치하였다. 찬궁의 크기는 남북 길이 12자, 동서 너비 7자 5치, 높이는 6자 5치가량 된다. 또 찬궁 동쪽에는 영침을 설치하고 찬궁 남쪽에는 영좌를 설치하였다. 찬궁에는 시신을 모시고, 영침에는 혼백함에 넣어 둔 혼백을 모셨다. 아침저녁으로, 영침에 있는 혼백을 영좌에 모셔 두고 식사를 올렸다.

변천

조선초기 영악전은 휘장을 이용하여 조성하였으나, 어느 시기부터 목조 건물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1545년(명종 즉위)에는 이미 목조 건물로 조성되어 객사(客舍)를 지을 때, 영악전에 사용한 목재를 이용하도록 하였다(『명종실록』 즉위년 10월 11일). 산릉을 조성할 때의 상황을 기록한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 중에서 현재 남아 있는 것 중에 영악전을 조성한 기록을 담고 있는 것은 총 8건이다. 여기에는 1601년(선조 34)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장례를 위해 산릉을 조성한 『[의인왕후]산릉도감의궤([懿仁王后]山陵都監儀軌)』와 1674년(현종 15) 인선왕후의 산릉을 여주에 조성한 내용을 담은 『[인선왕후]산릉도감의궤([仁宣王后]山陵都監儀軌)』가 포함된다. 이 의궤에서 목조 건물로 조성된 영악전의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674년(숙종 즉위)이 되면 영악전을 짓지 않게 되어 조선후기에 영악전은 사라진다.

1674년에 영악전 제도를 폐지하게 되는 계기는 1673년(현종 14) 효종 영릉(寧陵)을 옮기는 일에서 찾을 수 있다(『현종실록』 14년 6월 12일). 1674년 4월 9일 김수흥(金壽興)이 영악전의 제도가 규모가 크고 공역이 매우 심하며, 큰비가 내리면 정전과 배위청의 접하는 부분에서 비가 샐 우려가 있다며 걱정하였다. 실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국상에서 영악전에 비가 새기도 하였다. 이에 민유중(閔維重)이 구릉의 정자각을 철거하지 말고 정자각에 재궁을 봉안하여 영악전을 새로 짓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건의했고 현종이 허락하였다. 따라서 임시 건물로 영악전을 조성하지 않고 구(舊)정자각을 이용하였다.

천봉(遷奉) 시에는 구정자각이 있으니 영악전을 짓지 않아도 재궁을 봉안할 만한 공간이 있었다. 그러나 1674년에는 현종의 숭릉(崇陵)을 조성하면서 영악전을 짓지 않고 새로 조성한 정자각에서 의례를 행하도록 하였다. 재궁을 봉안하던 건물에서 신주를 모시지 않던 과거와는 달리, 정자각에서 장례 전에는 재궁을 봉안했다가 장례가 끝나면 내부 배설을 바꾸고 신주를 모두 모시게 된 것이다. 영악전을 설치하지 않게 되면서 산릉의 중심 건물이 정자각으로 단일화되고, 내부에 재궁을 봉안하는 찬궁을 설치해야 하므로 정자각의 규모가 확대되었다.

참고문헌

  •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상장례 설행공간의 건축특성: 빈전·산릉·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 신지혜, 「조선후기 영악전 기능수용에 따른 정자각 평면변화 고찰」, 『건축역사연구: 한국건축역사학회논문집』제18권 4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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