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흥진(安興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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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안흥진 |
한글표제 | 안흥진 |
한자표제 | 安興鎭 |
상위어 | 주진(州鎭), 수영(水營), 순영(巡營) |
동의어 | 거진(巨鎭), 안흥진관(安興鎭管) |
관련어 |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만호(萬戶), 순찰사(巡察使), 방어영(防禦營), 방어사(防禦使), 행영(行營), 우후(虞候) |
분야 | 정치/군사·국방/편제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조선 |
집필자 | 서태원 |
폐지 시기 | 1895년(고종 32)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안흥진(安興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효종실록』 3년 9월 3일 |
조선후기 충청도 태안군 근서면에 설치한 수군 거진.
개설
안흥진은 1609년(광해군 1) 충청도 태안군 근서면에 설치한 수군 거진(巨鎭)이다. 안흥진은 방어영으로 승격되거나 충청도 수영의 행영(行營)이 되는 등의 변화를 겪었다.
안흥진은 ‘제승루, 동헌, 군향고, 군기고’ 등이 있었고, 전함으로는 ‘귀선(龜船), 방선(防船), 병선[卜物船, 짐배], 사후선’이 있었다. 군병으로는 수군, 별신선(別新選), 주사장졸(舟師將卒)’ 등이 설치되었다. 재정 수입으로는 결전·별신선전·수군전 등이 있었는데, 첨사의 급료나 방군급대(防軍給代) 등으로 사용되었다.
안흥진은 군향(軍餉)을 유치하여 강화도 방어를 지원하였고, 조운선 호송과 황당선 체포 등을 담당하였다.
1895년(고종 32)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안흥진은 『호서읍지』에 따르면 1609년(광해군 1) 수군첨절제사의 거진(巨鎭)으로 설치되었다. 조선전기부터 안흥량(安興粱)에서 조운선이 빈번하게 침몰하였고, 왜구가 침입하여 주변 지역을 약탈하는 일도 잦았다. 임진왜란 때는 일본 수군의 북상을 저지할 장소로 안흥량이 거론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안흥진은 조운선의 안전한 호송과 충청도 바다의 방어가 설립 목적이었다. 아울러 1654년(효종 5)부터 석성을 쌓은 것은 강화도 방어를 지원하기 위해 안흥진에 군량미를 비축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안흥진 설치는 강화도 방어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조직 및 역할
안흥진은 종3품 수군첨절제사가 최고 지휘관인 거진인데, 휘하에 제진(諸鎭)은 없었다. 안흥진의 건물로는 ‘제승루 19칸, 동헌 6칸, 아사 7칸, 삼문 3칸, 종각 1칸, 반구정 3칸, 비장청 3칸, 헐소청 1칸, 장교청 7칸, 감관청 3칸, 관청 3칸, 진무청 8칸, 지인청 4칸, 사령청 7칸, 관노청 5칸, 어변정 6칸, 봉국사 15칸, 군향고 10칸, 병고 2칸, 군기고 8칸, 조총고 2칸, 화약고 2칸, 주사군기고 4칸, 변물고 3칸’ 등이 있었다.
전함은 ‘귀선 1척, 방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3척’이 설치되었는데, 남문 바깥에 선창이 있었다.
군병은 ‘대장(代將) 2명, 지구관 1명, 기패관 10명, 교사 2명, 포도관 4명, 훈도 2명, 화포교사 2명, 수군 863명, 기병 400명, 별신선 235명, 주사장졸 327명’ 등이었다. 재정 수입은 결전 865냥과 별신선 470냥을 비롯하여 수군전·기병전·병량미·소금·호시(戶柴) 등이 있는데, ‘첨사·군관의 급료와 방군급대 등의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안흥진은 군량을 유치하여 강화도 방어를 지원하였고, 조세용 벼 따위를 실어 나르는 세선(稅船)의 호송 및 황당선의 체포를 담당하였다. 아울러 안흥진은 병인·신미양요를 겪으면서 포군(砲軍)을 신설하여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도 대비하였다. 이 지역 특산물 생복(生鰒)을 진상하였다.
변천
안흥진의 ‘안흥(安興)’은, 조운선이 자주 침몰하여 ‘다니기 힘든 바다’라는 뜻으로 붙여진 ‘난행량(難行梁)’을 ‘편안함이 흥하라’는 안흥량(安興粱)으로 고친 것에서 유래하였다. 1609년 수군첨절제사의 진으로 설치되었는데, 1595년 이전에 설치된 안흥만호의 진이 승격한 것으로 보인다.
1652년(효종 3) 안흥진에 중진(重鎭)을 설치하고 양식을 비축하여, 유사시 강화도를 지원하자는 이후원(李厚源)의 주장(『효종실록』 3년 9월 3일)이 이듬해에 채택되었다. 1654년부터 쌓은 석성(石城)이 완성되면서 안흥진에는 신진(新鎭)도 설치되었다. 아울러 안흥진은 1711년(숙종 37) 방어영으로 승격된 적도 있지만, 1675년·1706년·1866년(고종 3)에는 태안방어영에 편입되었고, 1779년(정조 3)에는 충청도수영의 행영이 되는 등, 많은 변화를 겪었다.
1895년 을미개혁 때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일성록(日省錄)』
- 『각사등록(各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호서읍지(湖西邑誌)』
-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
- 『양역실총(良役實總)』
- 『부역실총(賦役實總)』
- 김경옥, 「조선후기 태안 안흥진의 설치와 성안마을의 공간구조」, 『역사학연구』32, 2008.
- 서정석, 「태안 안흥진성에 대한 일고찰」, 『역사교육』3·4, 1999.
- 서태원, 「조선후기 충청도 평신진 연구」, 『중앙사론』34, 2011.
- 황의천, 「조선시대 충청수영과 속진의 위치에 대한 연구」, 『보령문화』1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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