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인(宋象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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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9년(선조2)∼1631년(인조9) = 63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성구(聖求), 호는 서곽(西郭)이다. 본관은 여산(礪山)인데, 서울 출신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감찰송복흥(宋復興)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충의위(忠義衛)김승석(金承碩)의 딸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순절한 동래부사(東萊府使)송상현(宋象賢)의 아우이다.

광해군 시대 유배 생활

1605년(선조38)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에 성균관 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1609년(광해군1) 추천을 받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임명되었는데, 선조의 국상(國喪)을 당하여 멋대로 술을 마시고 창기의 집에서 놀았다는 탄핵을 받아 함경북도평사(咸鏡北道評事)로 좌천되었다. 돌아와서 형조 좌랑이 되었는데, 1612년(광해군4) 그의 이종사촌 <김직재(金直哉)의 옥사(獄事)>가 일어났다. 김직재와 그 아들 김백함(金白緘)이 광해군을 제거하고 진릉군(晉陵君) 이태경(李泰慶)을 추대하려고 하다가, 부자가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고 가산(家産)이 적몰(籍沒)되었다. 송상인은 이에 연루되어 참혹한 형벌을 받았는데, 그는 “송상현(宋象賢)의 동생으로서 4대를 거쳐 과거에 올라 언제나 충성만 다할 생각이었고,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았습니다.”라고 항변하였다. 송상현의 옛 친구들이 구원하니 광해군은 그를 용서하되 제주도로 유배하고 10여 년 동안 위리안치(圍離安置)하였다. 당시 송상인은 미수(眉叟)허목(許穆) · 간옹(艮翁)이익(李瀷)과 함께 모두 같은 곳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허목은 글을 읽고 행실을 가다듬어 지조를 지켰고, 송상인은 바둑만을 두고, 이익은 거문고만을 타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인조 시대의 활동

1623년(인조1)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유배생활에서 풀려나서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지평으로 전임되었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예조 정랑송상인에게 명하여 평안도 지방을 선유(宣諭)하게 하였다. 송상인은 평안도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돌아와서,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 · 사성(司成)으로 승진하고, 또 사헌부의 장령(掌令) ·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 의정부와 이조가 같이 의논한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는데, 택당(澤堂)이식(李植)이 나서서 그를 곧장 전조(銓曹)의 정랑(正郞)에 임명하려는 것을 막으려고 그가 등록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세자빈(世子嬪)을 간택할 때 가례도감(嘉禮都監)낭청(郎廳)에 선정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1625년(인조3) 사도시(司導寺) 정(正) · 사복시(司僕寺) 정을 거쳐, 안동부사(安東府使)로 나갔다. 이때 안동 고을에는 토호(土豪)들이 온통 무단(武斷)하는 풍조가 만연되었으므로, 조정에서 이를 제압할 만한 인물을 고르다가 송상인을 선발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청렴하고 강직한 송상인을 싫어한 집정자 김류(金瑬)가 조정에서 내쫓은 것이었다. 안동부사로 부임하여 관가에 양곡을 바치지 않는다고 향교의 선비를 신문하다가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인명을 다쳤기 때문에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서 파면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군량미 운반하는 것을 감독하는 어사(御使)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방의 양곡을 기한 안에 운송하도록 독려하였으며, 돌아와서 다시 사헌부 집의에 임명되었다. 그때 인조의 외척 ‘능성구씨(綾城具氏)’ 중에서 임금의 특별한 비지(批旨)로 승진 발탁된 자가 있으므로, 이것을 논박하여 강력히 반대하다가 종부시(宗簿寺) 정으로 좌천되었다. 남원부사(南原府使)로 나가 도둑들을 체포하여 엄하게 치죄(治罪)하였는데, 암행어사가 이를 보고하여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되었다. 그 공적으로 1629년(인조7) 전라도관찰사로 승진되었으나, 오래지 않아 반대파의 모함에 걸려서 파직되었다. 그 후에 여러 차례 병조 참지 ·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관직에 부임하지 않았다. 1631년(인조9) 윤11월 병으로 죽었는데, 향년이 63세였다. 집이 가난하여 염(殮)을 할 수가 없어서 친구들이 수의(壽衣)를 마련해주어 장사를 치를 수가 있었다.

성품과 일화

송상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청백하였다. 젊어서부터 명성과 행실로 널리 알려졌는데, 재물을 경시하고 의리를 중시하였으며, 친척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관직을 맡아 직무를 수행할 적에는 강경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정에 들어와 대각(臺閣)에 있을 때에는 과감하게 직언(直言)하는 사람으로 일컬어졌고, 군읍(郡邑)과 감영(監營)에 나가서 다스릴 때에는 풍채가 엄하고 굳세어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명령을 내리면 행해지고 금지를 하면 그쳤다. 그러나 성품이 강직하여 다른 사람과 마음이 잘 맞지 않았기 때문에 내직(內職)에 오래 편안히 있지를 못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처음에 경기도 양주(楊州) 야목리(野木里)에 있었으나, 나중에 양근군(楊根郡) 서쪽 정배촌(鼎背村)의 묘원으로 옮겨서, 첫째 부인과 합장(合葬)하였다. 그의 친구 계곡(溪谷)장유(張維)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계곡집(谿谷集)』 권12) 첫째 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는 정석희(鄭錫禧)의 딸인데, 자녀는 2녀를 두었다. 둘째 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는 신무(申茂)의 딸인데, 후사가 없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계곡집(谿谷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동계집(桐溪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사계전서(沙溪全書)』
  • 『속잡록(續雜錄)』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창석집(蒼石集)』
  • 『명곡집(明谷集)』
  • 『소재집(疎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