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상기(宋相琦)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송상기 |
한글표제 | 송상기 |
한자표제 | 宋相琦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숙종~경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옥여(玉汝) |
호 | 옥오재(玉吾齋) |
시호 | 문정(文貞)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57년(효종8) |
사망 | 1723년(경종3) |
본관 | 은진(恩津) |
주거지 | 충청도 회덕(懷德), 서울 |
묘소소재지 | 충청도 공주(公州) 삼미천(三美川)의 언덕 |
증조부 | 송희원(宋希遠) |
조부 | 송국전(宋國銓) |
부 | 송규렴(宋奎濂) |
모_외조 | 안동김씨(安東金氏): 김광찬(金光燦)의 딸, 김상헌(金尙憲)의 손녀 |
처_장인 | 칠원윤씨(漆原尹氏): 윤선적(尹宣績)의 딸 →(자녀)1남 5녀 |
자녀 | (1자)송필환(宋必煥) (1녀)이하곤(李夏坤)의 처 (2녀)이천기(李天紀)의 처 (3녀)윤득항(尹得恒)의 처 (4녀)서명빈(徐命彬)의 처 (5녀)민통수(閔通洙)의 처 |
저술문집 | 『옥오재집(玉吾齋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상기(宋相琦) |
총론
[1657년(효종8)∼1723년(경종3) = 67세]. 조선 후기 숙종~경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옥여(玉汝), 호는 옥오재(玉吾齋)이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아버지는 예조 판서송규렴(宋奎濂)이고, 어머니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중추부 동지사김광찬(金光燦)의 딸이자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의 손녀이며 문곡(文谷)김수항(金壽恒)의 누이였다. 동향 친척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의 문인이다.
숙종 때 장희빈과 갈등 관계
1684년(숙종10) 정시(庭試)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가, 1685년(숙종11)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어, 저작(著作)에 임명되었다. 이보다 앞서 역관(驛官)장현(張炫)의 종질녀인 장씨(張氏)가 동평군(東平君)이항(李杭)과 조사석(趙師錫)의 주선으로 궁녀로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아, 1686년(숙종12)에 숙원(淑媛)이 되었다. 그리고 숙종은 동평군이항을 사옹원(司饔院)제거(提擧)에 임명하였는데, 그는 차자를 올려서 이를 논박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1687년(숙종13) 김만중(金萬重)이 경연(經筵)에서 조사석을 비방하자 숙종이 크게 화를 내어 그를 하옥(下獄)하고, 승지에게 사관(史官)이 기록한 전지(傳旨)를 가져오라고 재촉한 일이 있었는데, 예문관 검열이었던 송상기는 숙종에게 사필(史筆)을 내어줄 수 없다고 버티었다. 1688년(숙종14)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다. 이때 후궁 장씨의 어머니가 부부인(府夫人)의 옥교(屋轎)를 탄 사실이 알려졌는데, 그는 차자를 올려서 그 옥교를 불태워버리자고 청하였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1689년(숙종15) 다시 홍문관 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 이때 숙종은 후궁 장씨가 낳은 왕자 이윤(李昀: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禧嬪)으로 승격시켰다. 송시열과 김수항을 비롯한 서인들은 이를 반대하다가 조사석 무리의 공격을 받았다. 그의 스승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고 그의 외삼촌 김수항 등 서인의 영수들도 유배 · 사사되었는데, 이것이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이어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위하고, 1690년 윤을 세자로 삼고 희빈장씨를 왕후로 삼자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5년 동안 두문불출하였다.
갑술옥사 이후 노론 활동
1694년(숙종20) 김춘택(金春澤) 등이 폐비의 복위운동을 전개하여 <갑술옥사(甲戌獄事)>가 일어나서, 남인 권대운(權大運) · 목내선(睦來善) 등이 쫓겨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중전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송상기는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다. 이때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張希載)가 중전 민씨를 모해하려던 사건이 발각되자, 그는 소론 대신 남구만(南九萬)의 온건론을 물리치고, 장희재의 처형을 주장하였다. 이어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갔으며, 1697년(숙종23) 세자 책봉을 청하는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어 청나라에 다녀와서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곧 승지(承旨)로 발탁되었다. 1698년(숙종24)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고, 이조 참의를 거쳐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 1700년(숙종26)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모친상을 당하였다. 1704년(숙종30)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고,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대사헌(大司憲)으로 전임되었다. 1707년(숙종33) 아버지를 봉양하기 위하여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는데, 1709년(숙종35) 부친상을 당하였다. 1712년(숙종38)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고, 형조 판서 · 이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713년(숙종39) 예조 판서 · 형조 판서를 거쳐,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으로 승진되었다가,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715년(숙종41) 공조 판서를 거쳐, 다시 이조 판서로서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였다. 1718년(숙종44) 이조 판서는 면직되었고,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돈녕부 판사가 되었다. 1720년(숙종46) 숙종이 돌아가자, 국장도감(國葬都監) 제조(提調)에 임명되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진되었고, 이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1721년(경종1) 돈녕부 판사에 임명되었다. 소론은 경종을 지지하였으나, 노론은 숙종의 제2자 연잉군(延礽君: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아, 경종은 본래 병이 있다고 일컫고 왕세제에게 실권을 넘겨서 대리 청정(聽政)할 것을 계획하였다. 소론 김일경(金一鏡) 등 7인이 상소하여 대리청정을 제기한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을 공격하였다. 이에 노론의 인물 5~60명 정도가 삭탈관작(削奪官爵) 당하였으나 송상기만 홀로 여기에서 빠졌다. 송상기가 상소하여 자수하니, 사헌부에서 극변(極邊)으로 귀양보낼 것을 청하여, 전라도 강진(康津)으로 유배되었다. 1723년(경종3) 6월 1일 유배지에서 죽었는데, 나이가 67세였다.
저서로는 『옥오재집(玉吾齋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송상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업에 뛰어나서 학문을 일찍이 성취하니, 사람들은 ‘기동(奇童)’이라 일컬었다. 일찍이 글을 배울 때 동춘당(同春堂)송준길이 항상 말하기를, “장차 이 아이의 명성과 지위가 나보다 낮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또 예조에 재임할 때, 과거 고시장(考試場)에서 일을 잘 처리하니, 우암(尤庵)송시열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가문에 사람이 있구나.” 하고, 시(詩) 두 수를 지어주면서 크게 격려하였다고 한다. 1684년(숙종10) 문과에 급제하자, 분애(汾厓)신정(申晸)이 그의 손을 잡아 들어주면서 말하기를, “대제학(大提學) 한 사람을 얻었구나.” 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앞날을 축하해 준 것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묘소는 충청도 공주(公州) 삼미천(三美川)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과 합장하였다.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도곡집(陶谷集)』 권9) 영조 때 관작이 복구되었다.
부인 칠원윤씨(漆原尹氏)는 생원(生員)윤선적(尹宣績)의 딸인데, 자녀는 1남 5녀를 두었다. 아들 송필환(宋必煥)은 군수(郡守)를 지냈고, 4녀는 승지(承旨)서명빈(徐命彬)의 처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옥오재집(玉吾齋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도곡집(陶谷集)』
- 『송자대전(宋子大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사계전서(沙溪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한수재집(寒水齋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중봉집(重峰集)』
- 『월당집(月塘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남계집(南溪集)』
- 『지호집(芝湖集)』
- 『서석집(瑞石集)』
- 『서파집(西坡集)』
- 『장암집(丈巖集)』
- 『몽와집(夢窩集)』
- 『농암집(農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