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간(成侃)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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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성간 |
한글표제 | 성간 |
한자표제 | 成侃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시인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단조~세조 |
집필자 | 정일영 |
자 | 화중(和仲) |
호 | 진일재(眞逸齋) |
출신 | 양반 |
성별 | 남 |
출생 | 1427년(세종 9) |
사망 | 1456년(세조 2) |
본관 | 창녕(昌寧)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성석연(成石珚) |
조부 | 성엄成揜) |
부 | 성염조(成念祖) |
모_외조 | 순흥 안씨(順興安氏) : 안종약(安從約)의 딸 |
형제 | (형)성임(成任), (동생)성현(成俔) |
처_장인 | 성주 이씨(星州李氏) : 이함녕(李咸寧)의 딸 → (자녀)3남 1녀 |
자녀 | (1자)성세걸(成世傑) (2자)성세적(成世勣) (3자)성세덕(成世德) (1녀)? |
저술문집 | 『진일재집(眞逸齋集)』, 『진일유고(眞逸遺稿)』 |
작품 | 「궁사(宮詞)」, 「신설부(伸雪賦)」, 「용부전(慵夫傳)」, 「원시(怨詩)」, 「백설부(白雪賦)」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성간(成侃)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단종실록』 2년 7월 7일, 『세조실록』 1년 9월 2일, 『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연산군일기』 즉위년 12월 25일 |
총론
[1427년(세종 9)~1456년(세조 2) = 30세]. 조선 전기 단종(端宗)~세조(世祖) 때의 문신, 시인. 집현전(集賢殿)박사(博士), 집현전 부수찬(副修撰)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화중(和仲)이고, 호는 진일재(眞逸齋)이다. 본관은 창녕(昌寧)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원(中樞院)지사(知事)를 지낸 성염조(成念祖)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목사(牧使)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판윤(判尹)을 지낸 성엄(成揜)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예조 판서(判書)를 지낸 성석연(成石珚)이다. 어릴 때부터 문재(文才)로 이름을 날렸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
단종~세조 시대 활동
1441년(세종 23)에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급제하였고, 1453년(단종 1)에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454년(단종 2)에는 집현전 박사를 역임했다.(『단종실록』 2년 7월 7일) 1455년(세조 1) 세조가 왕위에 오른 뒤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서 왕명을 받아 관제(官制)를 편찬하였고,(『세조실록』 1년 9월 2일) 2등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봉해졌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그러나 이듬해인 1456년(세조 2) 독서에 너무 빠져 몸이 쇠약해지면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해동잡록(海東雜錄)』],[『해동신감(海東臣鑑)』],[『기년편고(紀年便攷)』],[『상절태평광기(詳節太平廣記)』],[『필원잡기(筆苑雜記)』]
한편 문집으로 『진일재집(眞逸齋集)』, 『진일유고(眞逸遺稿)』가 있으며 그밖에 많은 시와 글이 여러 문집에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외모는 보통이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뛰어났고 시를 짓는데 호방하고 깊고 건장하며 삼엄한 법도가 있다는 평을 들었다.[『청파극담(靑坡劇談)』] 집현전에 들어가 서각(書閣) 안에서 밤새 책을 읽었고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아 동료들이 독서벽(讀書癖)이 있다고 놀릴 정도였다고 한다.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기문이록(奇聞異錄)까지 그가 섭렵한 책의 내용도 매우 다양했다. 경사(經史)로부터 제자백가와 천문·지리·의약·복서(卜筮)·도경(道經)·석교(釋敎)·산법(算法)·역어(譯語)의 모든 법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사대부나 친구의 집에 희귀한 서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반드시 구해보고야 말았다. 관심사가 넓어서였는지, 그의 형제들과 함께 불교에 혹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즉위년 12월 25일)
안평대군(安平大君)이 시를 좋아하여 학자들과 교제가 많았는데 성간 또한 초청을 받아 교류한 적이 있었다. 이에 그의 모친이 말하기를 “왕자의 도리는 문을 닫아 손님을 뿌리치고 근신하는 것이 당연하거늘 어찌 사람들을 모아 친구로 삼는다는 말인가. 실패할 것이 틀림없으니 교제하지 말라”고 경고하자 그 뒤의 초대에는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수언(粹言)』]
이밖에도 여러 일화들이 전하는데, 대부분이 그가 책을 좋아했다는 것과 뛰어난 문장에 관련된 것이다. 하루는 『사기(史記)』를 얻어서 끈으로 묶어 짊어지고 큰 시장을 지나다가 갑자기 끈이 끊어져 책이 땅에 떨어지니 시장 사람들이 다투어 미친 선비라고 지껄였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책을 정리하여 돌아보지도 않고 갔다고 한다. 또 중국 사신 예겸(倪謙)이 사명을 띠고 조선에 왔을 때 성간이 남을 대신하여 그를 전송하는 시를 지었는데, 예겸이 보고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으면서, “동국 문장이 중국보다 못지않다”고 극찬하였다.[『해동잡록』]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시와 글이 다수 남아있다. 주요 작품으로는 「신설부(新雪賦)」, 「원시(怨詩)」, 「청강곡(淸江曲)」, 「기강경우(寄姜景愚)」, 「기서강중(寄徐剛中)」, 「제야(除夜)」, 「궁사(宮詞)」, 「유관악사북암기(遊冠岳寺北巖記)」, 「용부전(慵夫傳)」 등이 있다.[『동문선』]
묘소와 후손
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교리(校理)를 지낸 이함녕(李咸寧)의 딸이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1남 성세걸(成世傑)은 어려서 죽었으며, 2남 성세적(成世勣)은 윤자영(尹子濚)의 딸과 결혼하였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올랐다. 3자 성세덕(成世德)은 윤홍(尹洪)의 딸과 혼인하였다.
참고문헌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기년편고(紀年便攷)』
- 『동문선(東文選)』
- 『상절태평광기(詳節太平廣記)』
- 『수언(粹言)』
- 『청파극담(靑坡劇談)』
- 『필원잡기(筆苑雜記)』
- 『해동신감(海東臣鑑)』
- 『해동잡록(海東雜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