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노오경(三老五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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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망이 많고 나이 많은 노인을 제왕의 부모형제와 같이 예우함.

개설

삼노오경(三老五更)은 덕망이 많지만 늙어서 벼슬에서 물러난 신하를 임금이 부형(父兄)과 같은 예(禮)로 대우하는 것인데, 중국 주나라 시대에 나라에서 노인을 대접하는 모범을 보이기 위해 특별히 뽑아서 예우하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조선초기부터 실시하다가 조선중기 이후 더욱 활발하게 시행되었다.

내용 및 특징

삼노오경은 『예기(禮記)』「문왕세자(文王世子)」 편에 있는 말로, 그 뜻은 덕망이 있지만 늙어서 벼슬에서 물러난 늙은 신하를 뜻한다. 삼노에 대해서는 하늘과 땅과 사람의 일을 아는 사람, 삼덕(三德) 즉 정직(正直)·강극(剛克)·유극(柔克)이 있는 사람, 삼신(三辰)을 본뜬 것 등의 뜻풀이가 있다. 오경에 대해서는 오행(五行)이 바뀌어 갈음하는 것을 아는 사람, 오사(五事) 즉 모(貌)·언(言)·시(視)·청(聽)·사(思)에 능한 사람, 오성(五星)을 본뜬 것 등의 뜻풀이가 있다.

삼노오경은 삼덕오사(三德五事)의 뜻으로 나라를 경영할 삼덕과 오사를 겸비하였지만 늙어서 벼슬에서 물러난 신하를 중국 주나라 시대에 천자가 부모형제의 예로 대접하였다 한다. 이후 삼노오경은 나이가 많으면서 덕망으로 한 마을을 잘 교화시켜 칭송이 자자한 노인이란 뜻으로 변하였다.

변천

세종대에 창평현령(昌平縣令)송복(宋復)은 "옛날에 나라에서 노인(老人) 기르는 법이 네 가지가 있는데 삼노오경의 제도가 첫째다."라고 하였다[『세종실록』 14년 2년 11월 5일 3번째기사]. 이는 인륜을 올바르게 세우고자 하는 것이었다. 또 세종은 양로연을 베풀면서 노인을 공경하는 뜻으로 어좌에서 내려서서 노인들을 기다리려고 하였는데, 신하들이 어좌에서 기다려 경로(敬老)의 의(義)를 나타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세종실록』 14년 8월 1일). 세종의 경로 정신이 극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세조는 관료들이 학문을 하지 않자, 옛날 경서를 빗겨 들고 도를 문의한 삼노오경을 견주어 학문을 권장하면서 세자(世子)로 하여금 문묘에 참배하고 석채례(釋采禮)를 행하도록 하였다(『세조실록』 11년 8월 5일).

성종대 주강(晝講)에서 동지사(同知事)이파(李坡)는 삼노오경의 거행을 건의하면서 노신(老臣) 정인지(鄭麟趾)·정창손(鄭昌孫)이 있을 때 거행함이 마땅하다고 하였으나, 정인지는 재물을 모았다고 하여 참예하지 못하였다(『성종실록』 8년 7월 23일). 뿐만 아니라 불교를 숭상한 이들도 참예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리하여 삼노오경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또한 검토관(檢討官)김맹성(金孟性)은 한나라 명제 때 시행한 삼노오경이 잘못 시행되어 비판받은 사례를 들며, 삼노오경을 시행할 때 인물을 선정함에 있어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하였다(『성종실록』 9년 1월 21일).

중종대에 노사숙유(老師宿儒)로 삼노오경이 될 만한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는지 파악하여 예우하려 하자, 나이와 덕이 함께 높으면 비록 한두 사람이라도 좋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중종실록』 4년 4월 11일). 이러한 일이 있은 이후, 중종은 "삼노오경에게 음식을 베푸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니, 이러한 일을 거행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삼노오경으로 삼을 만한 자가 없으므로 아직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다."(『중종실록』 11년 6월 4일)라고 하여, 어떤 왕보다 삼노오경의 예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삼노오경의 시행을 반대하기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중종대 영의정윤은보(尹殷輔)는 삼노오경이 왕이 시행할 만한 성대한 일이기는 하나 현재는 적절한 때가 아니라는 의견을 피력하자, 중종은 삼노오경에 해당하는 적격자를 얻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윤은보의 의견을 따랐다(『중종실록』 25년 1월 20일).

변천

조선후기 영조대 찬선(贊先)어유봉(魚有鳳)이 언로를 열고 신료를 접견하도록 아뢰었다. 영조는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을 면려하니 "찬선이 조금이라도 머물러 준다면, 내가 마땅히 태학에 친림(親臨)하여 삼노오경의 예를 행하여서 유생들로 하여금 용동(聳動)하게 하겠다."고 하니, 어유봉은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하면서 사양하였다(『영조실록』 18년 3월 28일). 또 1773년(영조 49)에는 안동(安東)의 유생 김상찬(金象燦)이 양로(養老)의 고례(古例)를 따라 행하기를 청하면서 한나라 때 삼노오경에 대한 내용을 인용하고 증거로 삼아 청하자, 옛날의 제도에서 구하지 않겠다고 비답하며 양로연을 베풀었다(『영조실록』 49년 3월 10일).

참고문헌

  • 『예기(禮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