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嗣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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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왕이 승하함에 따라 왕위를 이어받는 의절.

개설

사위는 조선왕조에서 가장 정상적인 왕위 계승의 형태로 선왕(先王)의 승하(昇遐)에 의한 즉위 형태이다. 사위는 선왕의 상중(喪中)에 행하기 때문에 오례 중에 흉례(凶禮)에 속하여 행해졌다. 조선의 역대 왕 가운데 문종, 단종, 성종, 연산군,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등 18명의 왕이 사위의 형태로 왕위에 올랐다. 선왕이 생존해 있는 상태에서 왕위를 잇는 경우 선위(禪位)라 했고, 반란을 일으켜 선왕을 왕위에서 끌어내린 후 오르는 경우 반정(反正)이라 했다.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같이 나라를 개창하여 왕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사위에 의한 즉위 의례는 전(殿)이 아닌 문(門)에서 거행하는데, 이는 선왕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차마 그 자리에 나아가지 못하는 마음을 표현한 것이다. 문을 통과해야만 전에 나아갈 수 있으므로, 선왕을 돌아가시게 한 불초자가 왕위에 오르는 의례를 ‘전’에서 편히 치를 수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사위 의례를 행할 때에는 상중임에도 잠시 상복(喪服)을 벗고 의례에 참여한다. 종친과 문무백관은 조복(朝服)으로, 왕이나 왕세자는 최복(衰服)을 벗고 면복(冕服)으로 갈아입고 의례에 참여한다. 장악원(掌樂院)에서는 악대를 동원하여 전정(殿庭)의 남쪽에 벌여 놓지만 상중이므로 연주는 하지 않는데, 이를 진이부작(陳而不作)이라 한다. 선왕의 죽음에 대해 애도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한 것으로, 소리를 내지 않음으로써 예를 표한다.

사위 의례는 조선시대 내내 큰 변화가 보이지 않으나 시기별로 관서 개편에 따른 명칭의 변화와 관직 명칭의 변화, 시행 장소의 변화가 수반된다. 세종대에 배설(排設)을 담당했던 ‘충호위(忠扈衛)’는 성종대에 ‘전설사(典設司)’로 바뀌며, 음악을 담당한 세종대의 ‘아악서(雅樂署)’는 성종대에 ‘장악원’으로, 세종대의 ‘통찬(通贊)’은 성종대에 ‘찬의(贊儀)’로 바뀐다. 아울러 세종대에 20인이었던 사금(司禁)의 숫자는 성종대 이후 16인으로 바뀐다. 또 시행 장소도 조선전기에는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예를 행했으나 조선후기에는 창덕궁 인정전(仁政殿)으로 바뀐다.

절차 및 내용

사위 의례는 성복례(成服禮)를 치른 후 선왕의 관을 모셔둔 빈전(殯殿)의 문 밖에서 거행하는데 왕위를 계승하는 사왕(嗣王)이 전왕(前王)의 유교(遺敎)대보(大寶)를 받은 후 문에 놓인 어좌(御座)에 오르는 절차로 구성된다. 『세종실록』「오례」에 보이는 사위 의례의 절차를 보면 먼저, 참여자의 자리를 각각의 지위에 맞추어 배설하고 도승지(都承旨)는 선왕의 유교를 담은 유교함(遺敎函)을 진설해 놓고, 상서관(尙瑞官)은 대보(大寶)를 진설한다. 종친과 문무백관, 영의정(領議政), 좌의정(左議政), 예조(禮曹) 판서(判書)가 각각 자리에 나아가 부복하면 왕세자가 면복을 입고 나오며, 사왕이 욕위(褥位)에 나아간다. 사향(司香)이 향을 세 번 올리는 삼상향(三上香)을 한 후 사왕 이하 모든 참석자가 네 번 절하는 사배례(四拜禮)를 행한다. 모든 호위 관원이 자리하고 악대가 배열되어 왕의 위의를 갖추고, 유교와 대보를 받는 의례를 행하면 왕은 비로소 문에 마련된 어좌에 올라 선왕을 이어 새로운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왕이 어좌에 오르면 향로를 피워 올린다. 이어 모든 신하는 사배례와 세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고두례(三叩頭禮)와 ‘천세, 천세, 천천세’를 외치는 산호(山呼)와 재산호(再山呼)를 외쳐 왕의 즉위를 경하한다. 다시 사배례를 행한 후 의례를 마치는데, 의례를 마친 후에는 다시 상복으로 갈아입고 상중에 행해야 하는 일에 임한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
  • 『춘관통고(春官通考)』
  • 김문식 외, 『즉위식, 국왕의 탄생』, 돌베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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