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궁도감(殯宮都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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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세자빈·후궁 등의 장례 시 빈궁의 설치와 운영을 관장하던 기관.

개설

빈궁(殯宮)은 왕세자·세자빈·후궁 등의 국장(國葬)이 발생했을 때 발인(發靷) 전까지 시신을 모셔두는 곳을 가리킨다. 국왕·왕비의 국장에서는 ‘빈전(殯殿)’이라 하였고, 왕세자 등의 상(喪)에서는 ‘빈궁’으로 지칭하여 빈전과의 위격을 구분하였다. 빈궁도감은 바로 이 빈궁의 설치 및 운영과 관련된 제반 업무들을 담당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초기에는 왕세자·세자빈의 상례에서뿐만 아니라 국왕의 상례나 고위대신의 장례에서도 ‘빈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태조실록』 3년 3월 24일) (『세종실록』 4년 9월 4일). 이는 당시까지는 아직 빈전과 빈궁의 위계가 확립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또, 이 기사들에는 빈궁도감의 설치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서, 당시 빈궁의 운영을 어느 기관에서 담당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빈궁도감의 설치와 운영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1457년(세조 3)으로, 당시 왕세자가 서거하자 장례 주관을 위해 국장도감(國葬都監)·조묘도감(造墓都監)·빈궁도감이 설치되었다(『세조실록』 3년 11월 8일).

한편, 빈궁도감의 업무는 발인 이후의 상례 기간 동안 신주를 모셔두는 곳인 혼궁(魂宮)의 운영을 담당한 혼궁도감(魂宮都監)의 업무와 중복되는 일이 많아서 두 도감이 함께 설치되어 운영되는 것이 관례였다. 빈궁도감의 계품(啓稟)에 따라 혼궁의 설치 장소를 정했던 숙종대의 사례는 두 기관의 업무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숙종실록』 44년 2월 8일).

조직 및 역할

빈궁도감의 조직은 조선후기에 편찬된 『빈궁도감의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728년(영조 4) 효장세자의 장례 때에 빈궁의 설치·운영에 관한 일을 기록한 『효장세자빈궁도감의궤』를 기준으로 빈궁도감의 조직과 기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빈궁도감은 왕세자·세자빈 등이 서거한 바로 당일에 설치되었다. 빈궁 운영의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는 도감에는 도제조(都提調)·제조(提調)·도청(都廳)·낭청(郎廳) 등의 관원들이 배치되어 업무를 담당하였다.

도감 아래에는 1·2·3방(房)의 하위 부서가 설치되고, 이곳에서 운영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1방은 빈궁도감에서 가장 많은 사무를 담당했던 부서로서, 각종 제전(祭奠)의 준비, 명정(銘旌)의 개정에 관련된 사항, 성복(成服) 이후 빈궁 운영과 관련된 제반 사항 등에 관한 업무들을 담당하였다. 1방 소속의 관원으로는 낭청 1명이 있었으며, 서리(書吏)·고직(庫直)·사령(使令)·수직군사(守直軍士) 등의 역원(役員)들도 배속되었다.

2방에서는 성복(成服)과 관련된 제반 업무를 담당했으며, 3방에서는 습렴(襲斂)·찬실배설(攢室排設) 등에 관한 여러 업무를 관장하였다. 2방·3방의 소속 관원은 1방과 마찬가지로 각각 낭청 1인이 있었으며, 서리·고직·사령·수직군사 등의 역원도 함께 배속되었다. 또, 빈궁에서 필요한 각종 물품을 제작하는 빈궁별공작(殯宮別工作)이 설치되었으며, 여기에는 감역관(監役官)과 각종 역원들이 배속되어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찬궁(攢宮) 제작을 담당하는 찬궁별공작(攢宮別工作)이 별도로 설치된 적도 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오례서례(國朝五禮序禮)』
  • 『효장세자빈궁도감의궤(孝章世子殯宮都監儀軌)』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분류별 의궤 해설집』,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 서울대학교 규장각 편, 『규장각 소장 의궤 해제집(2)』,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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