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봉상시(分奉常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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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방 소재 왕릉의 제물(祭物) 조달을 위해 설치한 봉상시의 분사(分司).

개설

분봉상시는 봉상시의 분사로 왕릉이 소재한 지역에 설치되었다. 각 지역의 분봉상시는 왕릉의 제향 때 제물을 바치는 것을 주 임무로 하였다. 개성부의 경우에는 성균관석전제(釋奠祭)에 사용되는 물품의 제공도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의 왕릉은 고양이나 파주를 비롯해 개성이나 여주 등지에 있었다. 분봉상시는 이들 왕릉의 제사 때 제물의 조달을 위해 봉상시의 분사로 설치된 관서이다. 봉상시는 종묘(宗廟)의 관리, 각종 제향, 시호(諡號) 등의 논의를 주관하여 중앙에 위치하였다. 이에 지방에 소재한 왕릉의 제향 때 제물의 조달 등을 위해 분사로 분봉상시를 설치한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상 분봉상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593년(선조 26)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인 경릉(敬陵),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인 현릉(顯陵), 중종 계비인 문정왕후의 능인 태릉(泰陵)의 파손된 곳을 수리하기 이전에 사유제(事由祭)를 지내면서 그때 사용할 제물을 분봉상시에게 진배(進排)하게 하면서였다(『선조실록』 26년 7월 27일).

조직 및 역할

분봉상시의 조직과 소속 관원은 당초에는 별도의 조직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798년(정조 22) 1월 개성에 설치한 분봉상시의 감독을 위해 봉상분관(奉常分官)이라는 직제를 설치하고 정원 2명을 두어 개성부의 경력과 교수가 예겸(例兼)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정조실록』 22년 1월 11일). 이후 분봉상시의 직제가 추가되어 순조 연간에는 개성의 경우지만 주부(主簿)직장(直長)을 설치하고 분교관(分敎官)이 이들을 담당하도록 하였다(『순조실록』 5년 7월 10일). 1867년(고종 4)에는 다시 주부와 부직장(副直長)을 각각 1명씩 추가로 설치하였다(『고종실록』 4년 5월 13일).

분봉상시의 주 역할은 왕릉의 제향에 사용하는 제물을 올리는 것이지만 이 밖에도 개성의 분봉상시는 서적전(西籍田)에서 나온 수확물을 성균관의 석전제 때에 제공하기도 하였다(『영조실록』 28년 1월 5일).

변천

경릉 등의 제향을 위해 설치된 분봉상시는 그 후 폐지되었다가 1629년(인조 7) 여주목사 김덕함(金德咸)의 요청에 따라 세종의 능인 영릉(英陵)의 제향을 위해 다시 설치되었다(『인조실록』 7년 2월 4일). 그러나 이후에 분봉상시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아 폐지되었고, 1843년(헌종 9)에 다시 설치하여 영릉과 함께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에도 제물을 올리도록 하였다(『헌종실록』 9년 1월 10일). 또한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수원에도 1801년(순조 1) 1월에 분봉상시가 설치되었다(『순조실록』 1년 1월 6일).

고종 초에 간행된 『육전조례』에 따르면 이상의 지역 이외에도 함흥과 안변(安邊)·문천(文川)을 비롯해 영월(寧越) 등지에도 분봉상시가 설치된 듯하다. 『육전조례』에 수록된 각 지역에 설치된 분봉상시의 관할 왕릉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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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육전조례(六典條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