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감(分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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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감에 속한 세곡창고(稅穀倉庫).

개설

조선시대에는 분호조(分戶曹), 분봉상시(分奉常寺)와 같이 국가 정책상 특정 관서의 업무를 보조하거나 분담하는 기구를 별도의 장소에 설치하고 ‘분○○’라 칭하였다. 군자감은 송현동의 별창과 용산강 변의 강감(江監)을 분감으로 두고 있었다. 이를 군자 3감이라 한다. 그러나 1746년 『속대전』이 간행될 무렵 본감과 별창은 폐지되고 용산강감만 존속하게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조선 초기에 중앙정부는 각 사에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조지인 위전(位田)을 분급해 주고 이를 통해 개별적으로 경비를 마련토록 하였다. 군자감은 군량미의 비축을 명분으로 가장 큰 규모의 위전을 확보하고 있었으며, 위전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은 군자감 창고에 보관되었다. 고려 말 전제개혁 과정에서 새로이 파악된 토지를 주로 군자위전(軍資位田), 즉 군자전에 편입시켰기 때문이다.

1445년(세종 27) 국용전제가 시행되고 각 사의 위전이 폐지되면서 군자감의 운영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군자감 역시 위전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중앙 각 사의 관할 창고에 납입되고 남은 여미(餘米)가 군자감 창고에 채워졌다. 그럼에도 군자감에 보관된 곡식은 이전보다 늘어나 세조대와 성종대에는 민가를 철수시키고 창고를 증설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530년(중종 25) 당시 국고곡으로 파악된 군자감의 곡식은 본감에 15만 석, 분감에 28만 석, 강감에 30만 석으로 집계되었다(『중종실록』 25년 1월 19일). 이를 합산하면 총 70만 석에 달하는 규모이다. 이처럼 군자감 곡식은 국용전제 이후 국고곡으로 관리되어 각 사의 경비부족을 보충해주거나 기근 시 진휼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조직 및 역할

군자감은 군수 물자의 비축을 담당하던 정3품 아문이다. 『경국대전』상의 직제를 살펴보면, 도제조와 제조 각 1인, 정(正) 1인, 부정(副正) 1인, 첨정(僉正) 2인, 판관(判官) 1인, 주부(主簿) 3인, 직장(直長) 1인, 봉사(奉事) 1인, 부봉사(副奉事) 1인, 참봉(參奉) 1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속대전』이 간행될 무렵 본감과 분감이 폐지되고 관원수도 줄어들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조선후기 군자감의 기능은 축소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변천

조선전기 군자감은 군수 물자를 비축하는 본래의 목적과 달리 대규모 군자위전과 국고곡을 관리하면서 중앙 경비의 부족분을 만회해주고, 필요시 진휼자원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자본감 외에 별창과 강감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후기 들어 전세운영에 변화가 나타나면서 군자감의 위상은 약화되고, 분감은 폐지되기에 이르렀다.

조선후기에 용산강감에서는 액정서(掖庭署) 소속 궐내외 아문의 장교(將校)와 이예(吏隸), 공장(工匠) 및 잡직에 급료를 지급하는 역할을 하였다. 실제로 『육전조례』 호전조를 살펴보면, 군자감 창고에서는 각 도의 전세를 4소장(所掌)에서 나누어 받아 창고에 수납한 뒤 호조의 지시에 따라 매달 구실아치들에게 주는 급료인 요미로 지급하고 있다. 군자감에서 호조의 명에 따라 지급한 요미는 쌀 2만 석, 좁쌀 2천 석, 콩 8천 석가량으로 집계된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육전조례(六典條例)』
  • 강제훈, 「조선초기 전세재정 연구-국고곡의 확보와 운용」,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8.
  • 오정섭, 「고려말·조선초 각사위전을 통해서 본 중앙재정」, 『한국사론』27, 1992.
  • 이장우, 「조선초기 군자전에 대한 일고찰」, 『역사학보』118, 198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