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미(餘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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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미 중 각 관서에서 불시에 일어나는 수요와 흉년을 대비하여 책정한 쌀.

개설

『대동사목(大同事目)』에 따르면 백성에게 걷은 쌀·포(布)는 크게 중앙 각사로 올라가는 것, 각 군현의 관수(官需)로 쓰이는 것, 예비비인 여미로 나뉘어 처리되었다. 여미는 대동미(大同米) 총액 중 중앙 각사로 올라가는 경상납(京上納)과 각 군현의 관수로 쓰이는 영읍소용(營邑所用)을 제외한 몫이었다. 경상납과 영읍소용이 경상비에 해당한다면, 여미는 예비비에 해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여미는 현물 공납제에서 가렴(加斂)의 단서가 되었던 쇄마(刷馬)와 과외(課外)의 역(役)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여미의 목적은 대동법의 설치 목적과 연결되었다. 즉, 대동미를 거두어들인 후 대개는 추가적인 징수가 발생하였는데, 그것이 민결 침탈로 이어지지 않게 해 주는 것이 바로 여미였다.

여미는 크게 2가지 기능이 있었다. 하나는 예비비 기능이었고, 다른 하나는 각 군현 사이 부담의 불균등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예비비의 기능도 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중앙에서 불시로 요구하는 별복정(別卜定)에 대한 대비였고 다른 하나는 흉년에 대한 대비였다.

현물 공납제 아래서 각 군현이 불시 과외의 역에 어떻게 대처하였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대동사목(大同事目)』에서는 이것을 위하여 여미라는 항목을 두었다. 대동법 운영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흉년이었다. 이에 흉년 시에는 각 군현에서 거두어야 하는 대동세 중 쌀 대신 포나 전(錢)을 대신 거두는 양을 늘리기도 하였다.

기록적인 흉년이었던 1671년(현종 12)을 시작으로 대동미를 줄여 준 사례는 27회에 이르렀다. 하지만 흉년을 대비하는 대동법 내부의 가장 큰 장치는 역시 여미의 책정이었다. 여미는 일차적으로 쇄마와 과외의 역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흉년에 대비해서 얼마나 남겨 두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여러 해에 걸쳐 묵은 곡식을 환곡으로 빌려주고 나중에 새 곡식으로 돌려받는 방식으로 여미를 축적했기 때문에 흉년에 대비한 여미의 양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비비 역할에 더하여 여미의 또 하나의 기능은 각 군현의 경제적 불균등을 조정하는 것이었다. 대동법에서는 각 군현의 불균등을 보완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각 군현의 전결(田結) 수에 따라 영읍소용과 여미의 크기에 차등을 둔 것이었다.

한편 여미는 지출뿐 아니라 보충에 대한 규정도 있었다. 병선(兵船)은 5년마다 새로 건조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이 기간을 넘겨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미리 책정되었던 예산은 여미로 이속(移屬)되었다. 각 군현의 감사지공미(監司支供米)도 지출되지 않았을 때에는 여미로 귀속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여미가 일종의 저수지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즉, 여미는 각 군현에서 집행되는 항목들의 예산상 과부족이나 집행 유무에 따른 예산 변동을 조절하였다.

각 군현에서 여미가 부족할 때는 선혜청에 보고하였고 선혜청에서는 서울의 경창(京倉)에 보관하고 있던 상납미(上納米)를 주거나 인근 읍의 여미, 또는 상평창 곡식으로 보충해 주었다. 이에 따른 저장 곡식량의 변동은 문서로 정리하여 1년에 4번 보고하였다. 비록 여미의 운영 자체는 지방의 관부에서 하였지만, 이러한 보고를 통해서 경외(京外)의 공물 운용이 통합적으로 관리되었다.

변천

대동법 시행을 계기로 지방군현에 유치미와 여미를 두는 규정이 확립된 것은 지방재정의 운영을 공식화한 조치였다. 다만 조선후기 중앙의 경비지출이 늘어나고 재정이 악화되면서 지방의 유치미분이 경상납되는 경향이 나타났는데, 이로써 지방 재정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옥근, 『조선 왕조 재정사 연구 Ⅲ』, 일조각, 1988.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삼는다』, 역사비평사, 2010.
  • 이정철, 「대동미·포의 구성: 『호서대동절목』·『전남도대동사목』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19, 2005.
  • 六反田豊, 「大同法における「留置米」「余米」「儲置米」槪念の檢討」, 『東洋史硏究』50-3,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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