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민고(補民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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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지방관청에서 국세 이외의 잡역 및 기타 관용잡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법이 아닌 각 지방군현의 관행에 따라 설치된 재정기구.

개설

대동법의 시행 후에도 대동작미에서 제외된 왕실과 중앙·지방관부의 진상과 공납 및 요역 명목의 본색잡역(本色雜役)이 적지 않은 규모로 외방인들에게 부과되고 있었다. 지방관청에서는 이들 잡역을 곡물이나 동전의 잡역세로 환산하여 대신 거두었다. 또 지방의 재정 상태는 법정 재원의 잠식과 상납(上納)과 읍용(邑用)에 소요되는 지출 수요의 증가로 악화되고 있었다. 그 부족한 재정 경비를 보충하기 위해서 지방관청에서는 곡물이나 금전을 징수하고 있었다.

지방관청에서는 잡역세 운영에서 민관 모두의 편의를 위하여 세목별로 각종 전담기구를 설립해 나갔다. 그러한 기구들은 공역(公役)을 수행한다 하여 공고(公庫)로 불리었다. 이들 잡역세 운영기구들은 계속 증설되어 비슷한 기능의 기구들이 남설(濫設)되고 있었다. 그 결과 많은 재정기구들이 설립되어 지방관청의 조직 구성을 크게 팽창시키었다. 잡역세 운영기구들은 설립 당시의 취지를 잃어버리고 점차 폐해를 일으키고 있었다. 각 기구들이 무분별하게 자금을 거두어들여 주민들의 조세 부담을 무겁게 하거나, 상호 대출·차입하여 재정 운영을 어렵게 하였기 때문이다. 파행적인 세정 운영으로 재정 모순은 악화되었고 백성들의 세금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에 기구들을 통폐합하여 합리적인 재정 운영을 시도하기도 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조선후기 지방관청의 잡역세 운영기구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민고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후기에 각 지방관청은 잡역세로 운영되는 여러 종류의 재정기구를 두고 있었다. 그중에 민고라는 이름의 기구도 있었는데, 한 고을의 민역(民役)이나 공용(公用)을 조달하는 기구였다.

민고는 대동법 시행 이후에 지방민, 지방관, 지방 양반 3자의 협력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 잡역의 분정과 지방재정의 열악화로 인하여 강화되고 있는 잡역세를 효과적으로 관리함으로써 관과 민 모두에게 편의를 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 때문에 민고는 거의 모든 군현에 설립되어 있었지만, 그 기능과 명칭 및 설립 시기는 군현의 형편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법제적인 기구가 아니라 지방관청에서 사사로이 설립한 기구였기 때문이다.

민고는 설립 당시 및 초기에는 특정한 용도 또는 제한된 용도만을 담당했고 재정의 규모도 작았다. 그러나 후대로 갈수록 잡역이 민고에 집중되고, 일부 재정기구들이 민고로 통합되고, 여러 기구와 직임이 각자 부담하고 있는 용도가 민고에 귀속됨으로써 민고의 담당용도는 증가했다. 재정체계의 집중으로 민고의 담당용도가 늘어나면서 재정 규모도 자연히 증가할 수밖에 없었고 민고 재정이 전체 지방 재정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은 민고의 재정구조와 관청 내 모든 기구들의 재정구조를 비교해 보면 쉽게 확인된다. 민고는 지방관청 내 기구들 중에서 가장 방대한 예산으로 진상, 경영납, 관용비 등 다양한 지출활동을 한 데 반해, 나머지 기구들은 재정의 규모가 민고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세출내역에서도 특정 잡역 혹은 일부 공공경비를 조달하는 데 그쳤다.

한편 민고는 관청 내의 여러 기구에 자금을 지원하고 공공자금을 이식·보관하는 일도 맡고 있었다. 다산정약용(丁若鏞)이 전세 외에 최대의 부세는 민고세이고, 민고세는 부역의 최대라고 하였던 말이나, 지방관청의 각종 상납비와 읍용비가 민고에서 나온다는 여러 암행어사의 지적은 이 상황을 말해 준다. 민고는 당시 최대의 지방 재정기구로 성장하였던 것이다.

그리 많지 않은 자금을 가지고 특정 잡역이나 공용만을 조달하는 기능에 머물고 있는 다른 재정기구와 민고는 동일하게 취급될 수 없었다. 당국에서 지방 재정의 문제를 거론할 때마다 민고를 예의주시하여 그 어떤 문제보다 우선 지적하고 그 개선책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유력계층들은 향권(鄕權)과 관련하여 민고의 운영권 향배에 깊은 관심을 가져 수향(首鄕)과 수리(首吏)로 하여금 민고의 감관(監官)과 색리(色吏)를 맡도록 하였다. 중앙과 지방 모두에 의해 민고는 중요 부서였고, 민고의 재정활동은 주목을 받았다.

내용 및 변천

민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중앙 차원의 법제적인 기구가 아니라 지방군현의 사설기구이기 때문에 그 운영내역은 지역마다 크게 달랐다. 다양한 운영내역을 짜임새 있게 제시하기란 어렵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도 번거롭다. 따라서 하나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운영내역을 이해하는 데에 훨씬 도움이 된다. 이러한 점에서 전라도순천부(順天府) 사례를 제시한다.

순천 향교 서고에는 작성 시기(1790년)와 내용이 똑같은 2부의 『보민고절목(補民庫節目)』이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다. 원칙적으로 관청에 보관되어야 할 이 문서가 향교에 보관되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처음에 민고는 잡역세 운영에서의 민관 편의를 위해서 설립되었지만, 18~19세기에 들어와 무거운 잡역세 징수와 부당한 자금 사용으로 지방민의 수탈을 가중시키는 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때문에 민고의 수입과 지출은 민생의 고락과 직결되는 문제로 부각되었고, 부당한 지출과 무거운 과세에 대한 주민들의 반발 또한 상당하였다. 주민들의 반발은 순천 지방 양반들의 향촌 지배질서 유지에 위협적인 요소로 떠올랐다. 이러한 상황에서 순천 지방 양반들은 민생의 안정을 통한 향촌 질서의 유지를 위해 민고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순천 지방 양반들은 향교를 거점으로 향촌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향교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순천 지방 양반들이 민고의 운영에 간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절목이 향교에 보관되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절목이 향교에 보관되어 온 또 다른 이유로 향교 관련 양반들이 민고를 운영하는 직책을 맡았던 점을 들 수 있다. 민고의 운영 직책은 도유사(都有司)·도감(都監)·색리·고자(庫子) 4계층으로 구성되었다. 고자는 관노비들이 맡았고, 색리는 향리들이 맡았다. 도감은 향청의 좌수를 역임한 자 중에서 차출되었다. 즉 향청을 중심으로 향권을 지배하고 있던 향임(鄕任)이 도감을 맡았던 것이다. 민고 운영의 최고 책임자인 도유사는 향망(鄕望)이 임명하였고, 이들을 향임과 구별하여 유임(儒任)이라고 불렀다. 유임이란 순천 지방의 명문 양반을 지칭한다. 이들은 주로 향교의 교임(校任)을 독점하여 향권을 지배했다. 즉, 향교를 독점하여 향촌활동을 하던 순천 지방의 명문 양반들이 민고의 최고 직책인 도유사를 맡았던 관계로 절목이 향교에 보관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순천 민고는 적어도 17세기 중엽에 설립되었다. 설립 초기에는 보민창(補民倉)이라 하여 민역을 담당했다. 1790년 순천 민고의 총 수입은 돈 1,166냥, 쌀 51석, 나락 28석, 콩 15두였다. 이들 수입은 토지 8결당 돈 1냥을 거둔 결렴(結斂), 관내 6개 장시에서 거둔 장세(場稅), 민고 소유 토지의 소작료인 민고전(民庫田), 사조곡을 면리에 분급한 이자인 사조모(社租耗), 감영에서 상납할 물품의 비용으로 내려 준 회감(會減)으로 이루어졌다.) 순천 민고의 세입은 계속 증가하였다. 세입의 증가는 바로 세출의 팽창을 의미한다.

1790년 순천 민고의 세출내역을 보면, 진상비, 중앙관청과 감·병·수영 상납비, 칙사 구청비에 자금을 사용하였다. 또 수령 행차비, 공문서 작성·발송비, 봄·가을 제사비, 각종 시험장 관리비, 수령 부의비, 신구 수령 영송비, 향교 보조비, 군대 훈련비, 민고 운영비 등에 자금을 사용하였다. 세출은 계속 확대되었고, 세출의 팽창은 매년 수입을 초과 지출하는 가하(加下)를 야기하였다. 가하는 여러 차례 추가 징수하는 가렴(加斂)을 유발하였고, 그것은 순천 지방의 심각한 민폐가 되었다.

순천에서는 민폐의 요인이 되는 민고의 세출 팽창 원인을 과다한 중앙관청과 감‧병‧수영 상납액에 있다고 보았다.) 실제 1790년에는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300냥 이상을 상납비로 사용하였다. 이에 순천에서는 본래 순천의 담당이 아니었던 경영(京營)의 분정을 삭감해 주도록 감영에 여러 차례 요청하였다. 이러한 순천의 상황과 요청에 대해서, 좌의정채제공(蔡濟恭)은 민고 폐단의 원인이 감영에 있다고 지적하였고, 정조(正祖)는 수령들이 법을 지키지 않고 부정을 저지르고 있으므로 감사로 하여금 폐단을 조치하라고 지시하고 암행어사에게 민원에 따라 민고 폐해의 원인을 개선하라고 지시하였다. 즉, 중앙에서는 민고폐의 책임이 감영과 수령에 있다고 보았고, 민고폐를 감사와 수령으로 하여금 해결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의 인식과 지시에 대해 감영에서는 영납물의 일부를 돈으로 내도록 허용하였고, 각 읍의 민고폐는 거의 동일함으로 순천의 경우 읍용비를 절약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고 하였고, 수령과 관속들이 부정을 저지르지 않도록 절목을 엄격하게 다시 작성하도록 하였다. 또 진상과 경영납 물종비로 이미 회감을 내려 주었는데 어찌 결렴을 실시하느냐고 꾸짖기까지 하였다.

중앙에서는 민고폐의 책임을 감영과 순천에 전가하였고, 감영에서는 다시 순천에 전가하였다. 중앙과 감영 모두 민고폐의 본질적인 문제, 즉 상납분의 증가에 대한 언급은 회피하고 책임 떠넘기기에만 급급하였다. 민고폐의 해결 방안을 순천 스스로 강구하도록 했음을 알 수 있다. 또 감영에서는 상납 물종가로 회감을 내려 주었다고 말하고 있으나 회감액은 실제 상납비의 극소량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민고에서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민고 폐단에 대한 중앙과 감영의 소극적인 태도 때문에 순천에서는 민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 외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세입을 증대하거나 읍용비를 삭감하는 길뿐이었다.

지방관청에서는 민고 폐단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여러 각도에서 시도하였다. 민고의 운영규정을 새로이 마련하고 그것을 정비하는 작업과 함께 엄격하게 준수하는 방안도 추진하였다. 또 세출의 삭감책과 세입의 증대책을 강구하였다. 중앙과 감영에서도 군현의 노력에 관심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들은 세출의 팽창, 세입의 한계, 개선의지의 결여로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갑오·광무개혁기에 지방제도가 개편될 때에 폐지되었다.

의의

민고는 방만한 재정체계를 흡수·통합하여 조선후기 최대의 지방 재정기구로 성장하였다. 지방의 유력계층들은 향촌의 지배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민고의 운영권을 장악하려 하였고, 지방관청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민고를 통해 조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후에는 관아의 자금 조달을 합리화하는 기구로 전락하여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가중시켰고 민중 항쟁을 불러일으켰다.

참고문헌

  • 김덕진, 『조선후기 지방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 김덕진, 『조선후기 경제사 연구』, 선인,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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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동표, 『조선후기 지방재정연구』, 국학자료원, 1999.
  • 김현구, 「18·19세기 거제부의 해세 운영과 민고」, 『부대사학』 19, 1995.
  • 양진석, 「18·19세기 제주의 수취제도와 특징」, 『탐라문화』 24, 2004.
  • <사진: 『순천보민고절목』(순천 향교 소장, 17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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