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협(邊協)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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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변협 |
한글표제 | 변협 |
한자표제 | 邊協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화중(和中) |
호 | 남호(南湖) |
시호 | 양정(襄靖)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28년(중종23) |
사망 | 1590년(선조23) 9월 5일 |
본관 | 원주(原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광주(廣州) 수종산(水鍾山) |
증조부 | 변환(邊煥) |
조부 | 변사겸(邊士謙) |
부 | 변계윤(邊季胤) |
모_외조 | 최씨(崔氏): 최자반(崔子泮)의 딸 |
처_장인 | 최씨(崔氏): 최유선(崔惟善)의 딸 |
자녀 | 변응성(邊應星)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변협(邊協) |
총론
[1528년(중종23)~1590년(선조23) =63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 활동한 무신. 자는 화중(和中), 호는 남호(南湖)이다. 본관은 원주(原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원 경력(經歷)변계윤(邊季胤)이고, 어머니 최씨(崔氏)는 참판최자반(崔子泮)의 딸이다. 원양군(原陽君)변사겸(邊士謙)의 손자이고, 공조 좌랑변열(邊悅)의 형이며, 변응정(邊應井)의 중부(仲父)이다.
을묘왜변과 변협의 활동
1548년(명종3) 무과(武科)에 3등으로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에 임명되었다. 1554년(명종9)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나갔는데, 1555년(명종10) <을묘왜변(乙卯倭變)>이 일어나서 왜구가 60여 척의 왜선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침략하였다. 앞서 1510년(중종5) 삼포(三浦)에 항상 거주하는 왜인들이, 그 항거왜인(恒居倭人)의 숫자를 줄이는 것에 불만을 품고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내통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를 <삼포왜란(三浦倭亂)>이라 하는데, 이 왜란이 진압된 후에 임신약조(壬申約條)가 체결되어 3포(浦) 중에서 제포(薺浦) 하나만을 개항하고,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50척에서 25척으로 줄였다. 그런데 이 조약에 불평을 품은 왜구들이 1555년에 대규모 선단(船團)을 조직하여 전라도 영암(靈岩) · 달량(達梁)을 침범하였던 것이다. 전라도병마사(全羅道兵馬使)원적(元績)과 장흥부사(長興府使)한온(韓蘊) 등은 왜구와 싸우다가 달량에서 포위되었다. 해남현감변협은 3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무장현감(茂長縣監)이남(李楠)과 함께 달량으로 달려가 병마사를 구원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달량이 왜적에게 함락되어 원적 · 한온 · 이남 등은 모두 전사하고 변협만 생존하여 해남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왜구들은 영암군수(靈岩郡守)이덕견(李德堅)을 생포하고, 난포(蘭浦) · 마도(馬島) · 장흥(長興) · 강진(康津) · 가리포(加里浦)를 차례로 함락하고 해남(海南)을 침입하였다. 그는 방어 대책을 수립하고, 여러 차례 기병(奇兵)과 복병(伏兵)으로 왜적을 요격하여, 크게 이겼다. 또 왜구에게 사로잡혔던 명(明)나라 사람들을 구출하여 중국으로 돌려보냈는데, 명나라에서 포상으로 금은과 비단을 보냈다. 호남 지방의 여러 고을이 잇달아 왜구에게 함락되었으나, 해남 고을만은 무사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28세였는데, 작은 고을의 보잘 것 없는 병사들을 이끌고 왜적을 크게 물리쳤기 때문에 선조가 그를 명장(名將)으로 여기게 되었다. 도순찰사(都巡察使)이준경(李浚慶)이 군사를 이끌고 와 영암에서 왜적을 토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 대마도주는 반란을 일으킨 주동자들의 목을 베어 바치면서 사과하고, 세견선의 증가를 간청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세견선을 5척 늘려주었다.
명종 시대 활동
변협은 <을묘왜변>에서 세운 전공으로 장흥부사로 승진하였는데, 왜적에게 약탈당한 장흥의 관청을 복구하고 민간인을 구제하는 데에 온갖 정력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그는 과로로 풍증(風症)에 걸려 관직을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와 5년 동안 정양하였다. 1560년(명종15) 병이 치료되자, 훈련도감 부정(副正)에 임명되어 내사복(內司僕)을 겸임하였고, 파주목사(坡州牧使)로 나갔다. 파주목사로 있을 때 공가(公暇)에는 율곡(栗谷)이이(李珥)를 찾아가서 『주역계몽(周易啓蒙)』 등을 배웠는데, 무장(武將)의 지략(智略)을 개발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1563년(명종18) 정3품 당상관(堂上官)으로 승품(陞品)하여 만포첨사(滿浦僉使)로 나갔다가, 1564년(명종19)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옮겼다. 1565년(명종20)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죽자 대비로부터 사랑을 받던 요승(妖僧) 보우(普雨)가 제주도로 귀양왔는데, 그가 불손하게 행동하므로 변협이 그를 장살(杖殺)하자, 유림(儒林)에서 통쾌하게 여겼다. 1565년(명종20)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기를 마치고 화량진첨사(花梁津僉使)로 나갔다가 경상도좌수사(慶尙道左水使)에 임명되었고 전라도병마사로 옮겼다. 그 때 동생 공조 좌랑변열이 죽자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슬퍼하는 어머니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동생의 아들 변응정을 친자식처럼 키우고 격려하여, 나중에 무과에 급제하게 만들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1) 전라도병마사로 나갔다가, 1569년(선조2) 안변부사(安邊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늙은 어머니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였다. 1570년(선조3) 남도병마사(南道兵馬使)로 나갔다가, 1571년(선조4)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여 북도병마사(北道兵馬使)로 임명되었다. 그해 겨울에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1572년(선조5) 모친상을 당하였다. 이때 압록강 서해평(西海坪)에 오랑캐가 옮겨와 농사를 지으면서 점점 그 숫자가 늘어났으므로 조정에서 이를 걱정하였다. 그의 3년 상기가 끝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로 임명하여 보냈다. 그는 군사를 동원하여 오랑캐를 소탕하는 한편, 그들을 회유(懷柔)하니, 오랑캐들이 감히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였다. 그들이 바로 누르하치의 건주위(建州衛) 오랑캐였다. 후임 인선이 어려웠기 때문에 선조는 평안도병마사의 임기를 연장하여 1년을 더 유임시켰다.
1574년(선조7) 오위도총부 부총관(副摠管)에 임명되었고, 1577년(선조10)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병조 참판으로 승진하였고,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거쳐 중추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 1582년(선조15)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하여 다시 평안도병마사로 나갔다가 중추부 지사를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 공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을 거쳐, 포도대장(捕盜大將)에 임명되어 비변사(備邊司)와 군기시(軍器寺)의 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1587년(선조20) 왜적들이 전라도 녹도(鹿島)를 함락하여 서울까지 동요가 일어나자, 전라우도방어사(全羅右道防禦使)에 변협을 임명하고 전라좌도방어사에 신립(申砬)을 임명하였는데, <임진왜란(壬辰倭亂)> 직전에 선조가 제일 신임한 명장은 변협 · 신립 · 이일(李鎰)이었다. 1589년(선조22) 일본에 통신사(通信使)를 보내는 문제를 비변사에서 의논하니, 변협은 사신을 보내 그들의 동정을 살피는 것도 실책이라고 하였다. 이때 선조가 변협을 병조 판서로 임명하려고 재상들에게 동의까지 구하였다. 그러나 그는 병이 깊어져 1590년(선조23) 9월 초5일에 서울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63세였다.
성품과 일화
변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천성은 온화하고 기품은 높았으며,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타서 무재(武才)가 뛰어났다. 평상시에는 근실하여 장자(長者)의 선비 기풍을 가졌으나, 싸움에 임할 적에는 영채(英采)가 사람을 압도하여 늠름한 기상을 누구도 감히 범할 수가 없었다. 경사(經史)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그 개략을 터득하여 병법에 활용하고 작전을 지휘하였다. 또 옛사람들의 뛰어난 충절과 위대한 행적을 흠모하여, 마음가짐과 행동을 항상 조심하였다. 효성과 우애를 천성적으로 타고나서, 늙은 어머니를 섬기는 데에 정성스레 봉양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뜻까지 잘 받들었다. 군사를 다스릴 때에는 한편으로는 체면을 갖추어 위엄을 세우고, 한편으로는 내실을 다져서 일절 실수를 허용하지 않으며 모든 일을 법대로 처리하니, 하리(下吏)들이 두려워 감히 불평하지 못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노는 것도 예사롭지 않았다. 여섯 살 때 혼자 우물가에 놀다가 깊은 우물 속으로 떨어졌는데, 우물 안에 쌓아올린 돌을 붙잡고 새벽까지 침착하게 버티다가, 물을 길러 온 이웃 사람에게 구출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1572년(선조5) 평안도병사로 나가서 국경 근처의 10여 군현을 순찰할 때, 그는 한번 눈으로 지나치기만 하면 산천이나 도로의 형세를 모두 기억하였으므로, 지도를 펴놓고 가리키는 곳을 찾아보면 하나도 틀리는 곳이 없었다. 이때 압록강 연안 10여 고을의 산천과 도로의 형세를 조사하고 요해처를 선정하여 오랑캐의 침략을 방비할 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압록강 유역의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방어체제를 구축하여, 이일이 만든 두만강 유역의 ‘제승방략’ 체제와 함께 북방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하게 하였다. 그는 죽을 때 이미 왜구의 변란이 있을 것을 예측하였는데, 그가 죽은 지 3년 뒤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야의 사람들이 지략을 갖춘 대장(大將)변협을 지하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하였다. 이때 선조도 이정귀(李廷龜)에게 “변협은 참으로 양장(良將)이었다. 나는 항상 그를 잊지 못한다. 그 사람이 지금 살아 있다면, 내가 어찌 왜적을 걱정하겠는가.” 라고 말하며 오래도록 그가 없음을 애석해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양정(襄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광주(廣州) 수종산(水鍾山)의 언덕에 있는데, 월사(月沙)이정귀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최씨(崔氏)는 증 참판(參判)최유선(崔惟善)의 딸로, 1남을 두었다. 아들 변응성(邊應星)은 무과에 급제하여 연천군(淵川君)에 봉해졌고, 대장(大將)을 지냈다. 변응성이 변협의 용모와 지략을 빼닮아서 대장이 되었으므로 변협의 죽음을 아쉬워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되었다. 아들 덕분에 아버지 변협은 좌의정으로 추증되었고,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추봉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월사집(月沙集)』
- 『지봉유설(芝峯遺說)』
- 『계갑일록(癸甲日錄)』
- 『기재잡기(寄齋雜記)』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석담일기(石潭日記)』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죽창한화(竹窓閑話)』
- 『포저집(浦渚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