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인(發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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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가(靈駕)가 빈전에서 출발하여 능소(陵所)에 이르러 임시로 혼백을 영좌(靈座)에 안치하고 전(奠)을 올리기까지의 의식.

개설

발인에는 영가를 안전하게 모시고 가는 수단과 수행 인원뿐 아니라 여러 의식 절차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송, 노제(路祭), 주정(晝停), 능소 도착 이후의 영좌 진설 등이다. 영가의 수행 문제는 1419년(세종 1)의 정종 국상에서 논의된 바 있다.(『세종실록』 1년 12월 19일) 『두씨통전(杜氏通典)』 당원릉의(唐元陵議) 주에는 ‘산릉 날짜는 시각의 길흉에 의하고, 이가(二駕)가 열을 갖추면 신가(神駕) 신여(神轝)가 움직이고, 시신은 말에 올라 앞에서 좌우로 모시게 하고, 온량거(轀輬車)가 발인하면 내외가 함께 울며 따라서 산릉에까지 나아간다.’ 하였고, 『문공가례(文公家禮)』에는 구(柩)가 길을 떠나면 방상(方相) 등이 앞을 인도하고, 상주 이하 남녀들은 울며 도보로 따라가는데, 존장은 그 다음에 서고, 무복(無服)의 친척은 또 그 다음이요, 손[賓客]들은 또 그 다음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에 따라 대행대왕의 장례는 옛 법에 의거하여 따라갈 만한 시신은 혼백을 좌우로 끼어 모시고, 나머지 여러 관원은 유거(柳車)의 뒤에 따르게 하였다. 따라서 그에 관한 법식을 마련한 것이 곧 발인의이다. 그리고 1451년(문종 즉위)에는 유복지친(有服之親)은 모두 백관의 뒤에서 시위하게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6월 2일).

관료들은 공무를 담임하고 있는 신분의 특성상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에서 문무관을 반씩 나누어 절반은 도성에 남도록 하였다. 이들 도성에 남아 있는 관리는 도성을 떠나는 영가와 작별하는 의식인 노제를 지냈다. 여기에는 일반인의 참석도 허락하여 기로(耆老)와 생도(生徒), 승도(僧徒)들도 봉사(奉辭)하도록 했다. 이들은 발인하는 날에 백관의 노제 악차(幄次)의 곁에 차례대로 서서 봉사하게 하였다. 그리고 각도의 관찰사(觀察使)들은 양계(兩界)를 제외하고 모두 올라와서 참석토록 했다.

궁궐을 출발한 영가는 도성문 밖에서 노제를 지낸다. 노정에서는 중간에 쉬어가는 의식을 거행하는데, 그 장소가 주정소(晝停所)이며 이곳에서는 전제(奠祭)를 올렸다. 외재궁을 모시고 능소로 나아갈 때의 담지군(擔持軍)은 많은 곳에서 교체되었는데, 체운처(替運處)는 보통 5리 내외에서 분정되었다. 체운의 횟수는 각 국상 때마다 다른데, 정조의 국상에는 24운(運)으로 거행했다. 영가가 능소에 도착하면, 그곳에 마련된 영악전의 영좌에 혼백함을 모시고 전제를 드리는 것으로 발인 절차는 끝나게 된다.

내용 및 특징

발인을 거행하기 전에는 세 차례에 걸쳐 습의를 실시했다. 적어도 노제소(路祭所)에 이르기까지 실제와 유사하게 치러졌는데, 배종하는 백관이 포단령과 모대를 하고서 차례로 나누어 서서 신백연(神帛輦)과 대여(大轝)를 국궁하여 지영하고 곧 시위하는 의절과 노제에서 봉사(奉辭)하는 의례 등의 행례를 연습했다. 이 습의에는 승지(承旨)와 사관(史官)도 참여하고, 병조와 도총부(都摠府)에서는 마포융복(麻布戎服)을 입고서 시위하는 연습을 행했다.

발인 하루 전에는 사직에 기청제(祈晴祭)를 지내고, 당일에는 궁문(宮門)과 성문(城門)에서 오십신위(五十神位)에 제사를 지냈다. 또 지나가는 교량(橋梁)·명산(名山)·대천(大川)에도 제사를 지냈는데, 이것은 고유제(告由祭)의 성격을 지녔다.

발인의 절차는 출발 단계를 시작으로 노제소와 주정소 및 능소에서의 행례로 나누어진다. 『세종실록』「오례(五禮)」에 의하면 절차는 아래와 같이 진행된다.

1) 출발

먼저 출발 준비부터 노제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자. 견전(遣奠)을 마치면, 출발 준비를 한다. 재궁(梓宮)을 메는 관원이 순(輴)을 빈전의 계단 아래에 남향하여 내놓는다. 혼백여(魂帛輿)는 순의 남쪽에 진설한다. 고명(誥命)과 시책보(諡冊寶) 및 애책(哀冊)을 각각 실은 요여(腰輿)와 향로와 향합을 둔 향정(香亭), 혼백함과 우주궤(虞主匱)를 안치한 요여가 중문(中門)을 거쳐 나간다. 내시(內侍)가 명정(銘旌)을 받들고 층계로 내려온다. 좌의정(左議政)이 재궁을 메는 관원과 내시를 거느리고 와서 재궁을 받들고 층계를 내려와 순에 올리고, 소금저(素錦楮)로 덮는다. 안팎이 모두 곡을 한다. 여사(轝士)가 순과 명정을 받들고 앞서 간다.

배종하는 백관은 이조와 병조에서 반(班)을 나누어 절반은 능소에서 시위하고 절반은 도감에 있도록 했다. 최질(衰絰)을 입은 승지와 사관 각 2명이 영가를 시위하며, 병조와 도총부에서 군사의 시위를 주관한다.

순이 외문(外門) 밖에 이르면, 혼백함을 거(車)에 안치한다. 재궁은 대여에 올리는데, 머리는 남쪽으로 한다. 혼백여·고명·시책보여·애책여·우보·명정과 삽을 차례로 진설한다. 여차(廬次)에 있던 왕은 여(輿)를 타고나와 중문 밖에서 연으로 갈아탄다. 대군(大君) 이하의 왕자와 종친, 문무백관이 차례로 걸어서 따른다.

종묘 앞에 이르면, 여사가 대여를 잠시 멈춰 돌려서 북향했다가 다시 돌려서 출발한다. 어연(御輦)이 종묘 앞길에 이르면, 왕은 연에서 내려 종묘 앞을 지나가서 연에 오른다. 선왕(先王)과 선후(先后)의 능 앞을 지날 때도 이와 같이 한다. 탁(鐸)을 쥔 사람이 이를 흔들면 영가가 움직인다. 궁인(宮人)은 말을 타고 따라가면서 곡소리를 끊이지 않게 하고, 내시도 곡을 하면서 도보로 따라간다.

2) 노제

성문 밖의 노제소에 이르면, 도성에 남아 있는 여러 관원이 하직하는 의식을 행한다. 문종 국장 때에는 의정부와 육조(六曹) 당상(堂上)과 낭청(郞廳) 각 1명, 제사(諸司) 각 2명이 참석했다. 영가가 출발하면, 전함(前銜) 재추(宰樞)·기로·학생·승도들은 길옆에 차례로 서 있다가 모두 부복하여 곡을 하면서 네 번 절하고, 또 곡을 하여 슬픔을 다한 다음에 네 번 절하고서 하직한다. 왕이 연에 오르고, 대군 이하의 왕자와 종친 및 백관이 모두 말을 타고서 시종(侍從)한다.

3) 주정

혼백거가 주정소의 유문(帷門) 밖에 이르면, 대축이 혼백함을 장전(帳殿) 속의 영좌에 안치한다. 영가는 잠시 멈춘다. 유사(攸司)가 예찬(禮饌)을 올리고, 조석전(朝夕奠)과 같이 행례한다. 마치면, 혼백함을 수레에 안치한다. 영가가 출발한다.

4) 능소 도착

영가가 산릉에 도착할 때 선원(先園)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 있을 것 같으면 조금 머물러서 늦추는 의식을 행한다. 능소에 이르면, 혼백거와 대여는 영악전(靈幄殿)의 유문 밖에 멈춘다. 재궁을 여에 내려 순에 올린다. 유문 안으로 들어가, 재궁을 순에서 내려 탑(榻) 위에 안치하는데 머리를 남쪽으로 향하게 한다. 영좌를 재궁의 남쪽에 남향하여 설치하고 혼백함을 안치한다. 우주궤는 그 뒤에 놓는다. 향안과 명정, 고명·시책보·애책을 진설하고, 영침을 재궁의 동쪽에 설치한다. 궁인이 들어와서 곡을 한다.

왕은 도착하여 잠시 악차로 들어간다. 대군 이하의 왕자, 종친과 백관들도 모두 말에서 내려 잠시 막차로 물러간다. 유사가 예찬을 진설한다. 집사자와 종친, 백관, 대군 이하의 왕자가 차례로 자리에 나아가고, 왕이 지팡이를 짚고 들어와서 자리에 나아간다. 왕은 무릎 꿇었다가 부복하여 곡을 하고, 대군 이하의 왕자와 종친, 백관도 똑같이 한다. 곡을 그치면, 대전관(大奠官)이 삼상향(三上香)하고, 술을 따라 영좌 앞에 올리고 물러간다. 왕 이하는 모두 곡을 하면서 슬픔을 다한다. 곡을 그치면, 종친과 백관들은 일어나서 네 번 절하고 모두 물러간다. 종친과 문무백관은 악차 앞에 차례로 무릎 꿇는다. 반수(班首)가 이름을 바치고 삼가 위문한다. 내시가 장전(帳殿)에서 시위(侍衛)한다. 조석전과 상식의 진설과 곡은 모두 처음처럼 한다.

변천

발인의에는 왕의 수종을 상정하였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왕이 수종하지 않을 경우에는 순이 외문 밖으로 나가기 전에 곡하고 전별하는 자리인 봉사위(奉辭位)를 마련했다. 경복궁인 경우에 도총부 앞뜰 곧 대궐문 안 동쪽 편이었으며, 창경궁에서는 명정문 밖이니 홍화문 안이었다. 이처럼 외문 안에 설치하던 것을 중문 안으로 변경하여 거행하기도 했다. 영가가 출궁하여 외문 밖에 잠깐 머물게 하고, 왕은 부복하여 곡하고 사배하며 봉사하였다. 이때에 왕비를 비롯하여 내명부도 각각 내정에다 자리를 마련하고 곡을 함에 슬픔을 다하는 망곡례를 행했다.

노제를 지내는 방법에 있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 노제를 시행할 때 명정이나 혼백의 사용 여부에 대한 것으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장례에서 명정을 노제에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지적은 1451년(문종 1)의 세종 국상 때, 예조(禮曹) 판서(判書) 허후(許詡)에게서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결국 의주(儀註)에는 다만 빈자리[虛座]만 설치해 두고 명정과 혼백은 사용하지 않았다. 이밖에도 허후의 지적에 따라 도성에 남아 있는 백관들이 노제를 지낼 때에는 길옆에서 곡하고 절하고는 하직하게 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

『오례의(五禮儀)』에는 의절이 완전하게 마련된 것이 아니었다. 미진한 조건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대책이 뒤따랐다. 그중의 하나가 재궁을 닦거나 싸매고 푸는 절차이다. 발인할 때에 으레 거행하는 이 절목을 보면, 재궁을 닦는 절차가 이미 순(輴)에 오르기 전에 있다. 이 의절은 우의정(右議政)이 담당했다. 그런데 재궁을 싼 것을 풀기 전에는 닦을 수 없었을 것이며, 발인할 때에는 싸맨 것이 길에서 받쳐들고 가는 동안에 흔들리고 움직여 약간이라도 느슨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순에 오르기 전에 재궁을 닦고서 다시 싸매고 산릉의 빈전에 이르러서도 싼 것을 풀어서 살피는 예(禮)를 행하도록 했다.

발인의 노정에는 기후의 변화 등으로 인한 돌발변수로 험난한 여정을 맞기도 했다. 또한 능소에 이르는 도중에 강이나 내가 포함되어 있을 때, 상여의 안전한 도강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의의

발인의 절차는 생전에 주인을 전송하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모시고 가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일상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각 의례의 성립 배경과 성격을 이해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정종대왕국장의궤(正宗大王國葬儀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