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관(朴以寬)
sillokwiki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박이관 |
한글표제 | 박이관 |
한자표제 | 朴以寬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전기 |
왕대 | 세조~중종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자유(子裕) |
호 | 보옹(葆翁)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본관 | 함양(咸陽) |
주거지 | 전라도 남평(南平): 전라도 나주 |
증조부 | 박득시(朴得時) |
조부 | 박해(朴解) |
부 | 박수화(朴遂和) |
형제 | (동생)박이홍(朴以洪) |
처_장인 | 서산 유씨(瑞山柳氏): 유정(柳丁)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이관(朴以寬) |
총론
[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 성종~중종 때 활동한 문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輔德)을 지냈다. 자는 자유(子裕)이고, 호는 보옹(葆翁)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이고 거주지는 남평(南平) 곧 전라도 나주이다. 아버지는 진사(進士)박수화(朴遂和)이다. 부인 서산유씨(瑞山柳氏)는 유정(柳丁)의 딸이다.
성종~중종 시대 활동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다음 1492년(성종 23)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1503년(연산군 9)에는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이 되었다. 1509년(중종 4)에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있었고, 1514년(중종 9) 11월에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그 뒤 홍문관(弘文館)전한(典翰)·세자시강원 보덕을 지냈다. 1518년(중종 13)에는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있었고, 그 뒤 홍주목사(洪州牧事)를 지냈다. 그러나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 젊은 많은 선비가 화를 입음을 보고 조정에서 물러나 동생 박이홍(朴以洪)과 더불어 명산을 순례하며 자연을 즐기며 학문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제향
전라도 창평의 유곡사(維谷祠)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담양읍지(潭陽邑誌)』
- 『국조방목(國朝榜目)』
- 『전라남도지(全羅南道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