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권(생몰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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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 미상. 조선 전기 성종(成宗)~연산군(燕山君) 때에 활동하던 문신. 자는 이경(而經), 호는 고광(孤狂)이다. 본관은 함양(咸陽)인데, 아버지는 전적(典籍)박성건(朴成乾)이다.

무오사화의 피화

1492년(성종23)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1497년(연산군3)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 1498년(연산군4) 7월 김일손(金馹孫)사초(史草)에 실린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에 대해 연산군(燕山君)이 의논하라고 명령하였을 때, 정언박권(朴權) 등이 의논하기를,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말이 많이 부도(不道)하므로, 그 죄가 목을 베어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이미 죽었으니, 작호(爵號)를 추탈하고 자손을 폐고(廢錮)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김종직의 대역(大逆) 사실이 이미 드러났는데도 이들이 논의를 이렇게 미지끈 하니, 이것은 그를 비호하려는 것이다.” 하고, 박권 등 대간(臺諫)의 관원들을 잡아다가 형장(刑杖)하여 심문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연산군은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내어 참시(斬屍)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이 일어나자, 박권은 함길도 길성(吉城)으로 유배되었다.

갑자사화의 피화

1504년(연산군10)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 제헌왕후齊獻王后)를 폐비(廢妃)한 문제 때문에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났을 때 박권은 일찍이 다른 죄로 장 1백 대를 맞고 전라도 해남(海南)에 유배되어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금부(義禁府)에서 박권이 일찍이 ‘체아직(遞兒職)내시부(內侍府)에 옮기는 것이 옳지 않다.’고 논계한 죄목을 써서 아뢰자, 연산군이 박권을 잡아오게 하였다. 1505년(연산군11) 박권에게 다시 장 1백 대의 형신(刑訊)을 더하고 다시 유배지로 돌려보냈다. 그 후에 그의 행적을 알 수 없는데, 전라도 유배지에서 풀려나지 못하고 죽은 것 같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전라도 영암(靈巖) 서면(西面) 구림리(鳩林里)에 있다. 전라도 영암에 있는 죽정서원(竹亭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