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閔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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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민기 |
한글표제 | 민기 |
한자표제 | 閔機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자선(子善) |
호 | 서한당(棲閑堂)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8년(선조1) |
사망 | 1641년(인조19) 12월 15일 |
본관 | 여흥(驪興) |
주거지 | 서울, 경상도 예천(醴泉) |
묘소소재지 | 충청도 제천(堤川) 원서창(遠西倉) 우경리(遇慶里) |
증조부 | 민제인(閔齊仁) |
조부 | 민사용(閔思容) |
부 | (양부)민여건(閔汝健) (생부)민여준(閔汝俊) |
모_외조 | (양모)진주강씨(晋州姜氏): 강사상(姜士尙)의 딸 (생모)전주이씨(全州李氏): 이경종(李景宗)의 딸 |
형제 | (동생)민구(閔構) |
처_장인 |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익현(洪翼賢)의 딸 →(자녀)1남 2녀 |
자녀 | (1자)민광훈(閔光勳) (1녀)윤창원(尹昌遠)의 처 (2녀)조석윤(趙錫胤)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민기(閔機) |
총론
[1568년(선조1)∼1641년(인조19) = 74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자선(子善), 호는 서한당(棲閑堂)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경상도 예천(醴泉)이다. 생부는 정랑민여준(閔汝俊)인데, 백부 현감(縣監)민여건(閔汝健)의 양자로 갔다. 생모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충의위(忠義衛)이경종(李景宗)의 딸이고, 양모 진주강씨(晋州姜氏)는 강사상(姜士尙)의 딸이다. 찬성민제인(閔齊仁)의 증손자이고, 좌의정민정중(閔鼎重)의 조부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97년(선조30)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604년(선조37)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감찰(監察)로 옮겼으며, 예조 · 형조 · 병조 · 공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607년(선조40) 삼화현령(三和縣令)과 안악군수(安岳郡守) · 순창군수(淳昌郡守)를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검찰사(檢察使)심열(沈悅)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는데, 영선과 토목에서의 공으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陞品)되었다. 부안현감(扶安縣監)이 되었을 때 치적(治績)이 제일이었으나, 1617년(광해군9) 순창군수(淳昌郡守)가 되었을 때는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였다고 파직되었다. 1618년(광해군10)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자, 광해군 때의 자급(資級)을 개정하도록 자청하니, 인조가 이를 허락하고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하여 보냈다. 당시 제주도는 토호의 세력이 강하고, 또 서울에서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에 모두 목사로 가기를 꺼리는 곳이었다. 그 뒤에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옮겼다가, 1625년(인조3) 종성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신병이 있어서 부임하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하자, 인조는 그가 극변(極邊)에서 오래도록 수고하였다고 곧바로 병조 참지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1626년(인조4) 장단부사(長湍府使)로 나갔는데, 인조가 야차(野次)하여 주정(晝停)할 때 와서 대기하지 않았다고 의금부에서 잡아다가 국문(鞫問)한 다음 파직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그가 어진 수령이라며 유임시켰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장단은 적(敵)을 맞는 요충지였으므로 부사에 무신(武臣)이 대신 임명되고 그는 소환되어 대가(大駕)를 강화도로 호종(扈從)하였다. 후금(後金) 군사가 물러가자, 춘천방어사(春川防禦使)에 임명되었다가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使)로 옮겼다. 1628년(인조6)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 · 좌부승지로 승진하였다. 1629년(인조7) 호조 판서심열(沈悅)이 그를 청렴하고 근신한 인물이라고 추천하여,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연안부사(延安府使) · 양양부사(襄陽府使) · 부평부사(富平府使)를 역임하였다. 1632년(인조10)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고, 1635년(인조13) 용양위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가, 1636년(인조14)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나갔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에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1637년(인조15) 벼슬에서 물러나 예천으로 돌아갔다. 서울과 예천을 오가며 지내다가 1641년(인조19) 12월 15일 노병으로 예천의 시골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74세였다.
성품과 일화
민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타고난 자질이 정성스럽고 겸손하고 침착하여 욕심이 적었다. 원만하고 후덕하여 넉넉한 여유가 있었으나 마음은 곧고 강직하여 외유내강(外柔內剛)한 덕을 갖추고 있었다. 대체로 그는 내면적으로 실질적인 것에는 힘쓰고, 외면적으로 명분적인 것에는 힘쓰지 않았다. 그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청렴결백한 지조가 있었다. 항상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었으므로 마치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번거롭고 어려운 큰 일을 만나면 민첩하고 과감하게 일을 처리하였다.
그가 승지로 있을 때 그의 아들 민광훈(閔光勳)이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는데, 아들의 이름이 있는 시권(試券: 답안지)을 인조 앞에서 읽을 때도 전혀 기뻐하는 기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또 그는 자제(子弟)들을 가르칠 때에 남의 장점이나 단점, 그리고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말하지 않았다. 부인에게는 수놓은 비단옷이나 주옥(珠玉) 같은 장식을 착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관원이 되어서 먼저 불의(不義)를 행한다면 아전의 무리들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자제들이 감히 관청의 물건이라면 실오라기 하나도 청하지 못하였다. 그가 관직에서 물러나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가족들은 신발만 신고 빈손으로 따라왔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충청도 제천(堤川) 원서창(遠西倉) 북쪽 우경리(遇慶里)에 있는데, 뒤에 부인과 합장되었다. 손자 민정중의 스승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 부인 남양홍씨(南陽洪氏)는 판관(判官)홍익현(洪翼賢)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아들 민광훈은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강원도관찰사를 지냈고, 차녀는 대사헌(大司憲)조석윤(趙錫胤)에게 시집갔다. 손자 민시중(閔蓍重) · 민정중 · 민유중(閔維重)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민유중의 딸이 인현왕후(仁顯王后)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송자대전(宋子大全)』
- 『백호전서(白湖全書)』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
- 『해사록(海槎錄)』
- 『백호집(白湖集)』
- 『이계집(耳溪集)』
- 『용담집(龍潭集)』
- 『인재집(訒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