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전(文政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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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문정전 |
한글표제 | 문정전 |
한자표제 | 文政殿 |
상위어 | 창경궁(昌慶宮), 편전(便殿) |
관련어 | 경모전(敬慕殿), 경사전(敬思殿), 경소전(敬昭殿), 경휘전(敬徽殿), 국상(國喪), 내전(內殿), 동궐(東闕), 상장례(喪葬禮), 영모전(永慕殿), 영사전(永思殿), 왕비(王妃), 재실(齋室), 혼전(魂殿), 효녕전(孝寧殿), 효사전(孝思殿), 효소전(孝昭殿), 효안전(孝安殿), 효정전(孝正殿), 효휘전(孝徽殿), 휘정전(徽定殿)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건축·능·원·묘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 이후 |
집필자 | 신지혜 |
건립시기/일시 | 1483년(성종 14) |
장소 | 창경궁 |
규모(정면/측면/칸수) | 정면 3칸/측면 3칸 |
양식 | 단층, 포집, 팔작지붕 |
관련 인물 | 성종, 서거정(徐居正), 광해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문정전(文政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15년 2월 11일, 『중종실록』 23년 8월 14일, 『선조실록』 8년 1월 10일, 『중종실록』 25년 8월 24일, 『광해군일기』 8년 2월 20일 |
창경궁 조성 당시 건립된 편전(便殿).
개설
1483년(성종 14) 옛 수강궁 자리에 창경궁을 조성할 때, 왕이 공식적으로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하는 편전으로 건립된 건물이다. 건물 조성이 완료된 1484년(성종 15)에 서거정(徐居正)이 창경궁의 정전인 명정전과 함께 문정전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성종실록』 15년 2월 11일). 창경궁은 대비들을 모시기 위한 목적으로 건립되었기 때문에 궁궐의 규모가 비교적 작으며 격식을 갖추지 못한 부분이 있다. 특히 궁궐의 정문인 홍화문과 정전인 명정전을 잇는 축이 동서 방향으로 형성되어 동향을 하고 있는 반면, 정전과 맞닿은 편전인 문정전은 남향으로 축을 달리하고 있다.
원래 편전으로 건립되었다고 하나 실제 편전으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조선후기 계속해서 혼전이 설치되어 조선시대 왕실 상장례 공간으로 대표되는 전각이다.
위치 및 용도
문정전은 명정전 남쪽에 남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1483년(성종 14) 창경궁 조성 당시 편전으로 조성되었으나, 왕이 신하를 만나 정사를 논하거나 경연하는 장소로 사용된 사례는 많지 않다. 성종 이후 연산군이 연회의 장소로 사용한 기록이 있으며, 1517년(중종 12)에 궁궐 잔치 중 하나인 진풍정(進豐呈)을 설행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23년 8월 14일). 선조가 즉위하여 이곳에서 경서를 강론하고 신하들을 만났으나, 1575년(선조 8)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혼전을 설치한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선조실록』 8년 1월 10일). 1595년(선조 28)에는 문정전에 도둑이 들어 어좌의 일월경(日月鏡)과 휘장을 가져갈 정도로 경비가 허술하고 잘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가장 오랜 기간 편전으로 사용된 것은 인조 연간이다. 인조 연간에는 이괄의 난 등으로 창덕궁의 선정전이 소실되어 문정전이 잠시 편전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인조는 이곳에서 경서를 강론하고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의논했다. 그리고 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르는 데 공을 세운 신하들을 불러 술을 내리고 재물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문정전이 혼전의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은 1530년(중종 25) 성종비 정현왕후(貞賢王后)의 혼전인 효경전(孝敬殿)을 설치하면서부터이다(『중종실록』 25년 8월 24일). 이후 17세기에는 혼전의 주 정전으로 활용되어 궁궐 안의 상장례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변천 및 현황
1530년(중종 25)에 성종비 정현왕후의 혼전을 문정전에 설치하였다. 이때 중종은 혼전에 제사 지낼 때 혼전의 뒤로 돌아서 가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으므로 광정문 안의 서편에 있는 명정전 남쪽 행랑에다 재실을 만들도록 하였다. 혼전에 국왕이 직접 제사 지낼 때에는 창덕궁 희정당에서 재숙(齋宿)하고 선화문(宣化門)으로 가서 소여(小輿)를 타고 광정문(光政門) 안에 있는 재실로 들어가 조금 머물러 있다가 제사를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문정전이 혼전으로 사용될 때에는 문정문 밖 명정전 남행각 춘추관을 어재실로 사용하였다. 또 문정문 밖 동남쪽에 배치되어 있던 도총부(都摠府)·주서청(注書廳)·승정원(承政院)·홍문관(弘文館)·대간청(臺諫廳)·빈청(賓廳) 등의 궐내 관청을 안향청(安香廳)과 전사청(典祀廳) 및 제사에 올릴 음식을 만들기 위한 여러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혼전으로 사용된 사례를 살펴보면, 1530년 정현왕후의 혼전인 효경전이 설치되었다. 인종 즉위년에는 중종의 혼전, 1575년(선조 8)에는 명종비 인순왕후의 혼전, 1578년(선조 11)에는 인종비 인성왕후(仁聖王后)의 혼전이 설치되었다.
17세기에 들어 1649년(효종 즉위) 인조의 혼전인 영사전(永思殿),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의 혼전인 경모전(敬慕殿), 1674년(현종 15)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혼전인 경사전(敬思殿) 등이 설치되었다. 숙종 연간에는 1683년(숙종 9) 현종비 명성왕후(明聖王后)의 혼전인 영모전(永慕殿), 1688년(숙종 14) 인조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혼전인 효사전(孝思殿), 숙종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혼전인 경녕전(敬寧殿)이 설치되었다. 숙종의 혼전인 효녕전(孝寧殿)과 경종의 혼전인 경소전(敬昭殿)도 이곳에 설치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 정조가 승하하자, 정순왕후(定順王后)는 정조의 혼전을 창덕궁 선정전에 설치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는 왕의 혼전이 선정전에 설치되었고 왕비의 혼전만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1843년(헌종 9) 효현왕후(孝顯王后)의 휘정전(徽定殿), 1860년(철종 11) 순원왕후(純元王后)의 효정전(孝正殿), 1878년(고종 15) 철인왕후(哲仁王后)의 효휘전(孝徽殿) 등이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임진왜란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이 소실되어 1616년(광해군 8)에 문정전을 중수(重修)하였다(『광해군일기』 8년 2월 20일). 광해군은 문정전을 중수하면서 명정전과 같은 좌향인 동향으로 변경하여 조성하려 하였다. 또한 기존에 사각기둥을 사용하던 것을 원기둥으로 새로이 조성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로 결국 옛 제도와 같이 남향으로 사각기둥을 세워 중수하였다.
1530년(중종 25)에 중종이 정현왕후의 혼전을 설행하던 시기부터 인조의 혼전을 설치하던 1649년(효종 즉위)까지 건축 공간은 다음과 같았다. 문정전은 의례 공간의 정전(正殿)이었고 문정전 문 밖에서 문정문까지 이어지는 제물 진설 행각은 7칸으로 설치하였다. 문정문 밖으로 제물 출입을 위한 행각을 마련하였고, 명정전 남행각에 어재실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혼전의 사용이 지속되면서 문정전 주변으로 건축 공간의 변화가 생겨났다.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의 혼전을 설치하면서 문정전 동행각에 소대청(召對廳)이 설치되었다. 서편에 있던 숭문당은 왕실 내명부의 곡림청(哭臨廳)으로 사용하면서 숭문당과 문정전을 연결하는 통경문과 그 옆으로 내제물 진설처를 마련하였다. 이전에는 혼전 의례에 공식적으로 왕실 내명부의 참여 공간을 배려하지 않았으며, 내명부의 특별한 의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조의 국상 이후 인조비 장렬왕후가 인조의 혼전에 망곡 의례를 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하면서, 숭문당 앞마당에서 내명부의 망곡 의례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후 효종의 혼전을 설치할 때는 미리 내명부의 곡림 공간을 숭문당에 마련하였다. 내명부에서 마련한 제물을 진설해 둘 내제물 진설처는 숭문당과 문정전이 연결되는 통명문(通慶門) 옆에 마련한 것으로 생각된다.
명정문 남행각에 마련된 어재실에는 춘추관(春秋館)이 위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자주 혼전이 마련되면서 어재실로 정착하게 되었다. 영조는 정성왕후(貞聖王后)와 인원왕후(仁元王后)의 혼전을 문정전에 설치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제례를 지내면서 어재실의 의미를 담아 「명정전남랑소지(明政殿南廊小識)」와 「재전기(齋殿記)」, 「재전흥회(齋殿興懷)」 등의 글을 남겼으며 친필 현판을 걸기도 하였다.
문정전이 혼전으로 자리 잡으면서 어재실로 사용된 춘추관 외에도 문정문 밖에 마련되었던 도총부와 승정원·홍문관 등의 여러 관청이 옮겨가게 되었다. 편전으로 사용될 당시 왕의 집무를 돕기 위해 가까이 설치되어 있던 관청이 점차 혼전의 부속 시설로 활용되면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문정전은 건립 초기 편전으로 조성되었으나 1530년 이후 혼전으로 사용되었다.
17세기에는 혼전의 주요 정전으로 장소성이 강해지면서 편전의 기능이 점점 약화되었다. 1781년(정조 5)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보면, 창덕궁과 경희궁에는 모두 선정전과 자정전 등의 편전이 있으나, 창경궁에는 편전이 없기 때문에 전부터 명정전을 편전으로 통용하여 왔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에는 문정전을 편전으로 인식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1616년(광해군 8)에 중건한 문정전은 대한제국기까지 존재했다. 193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의 명정전 정면 사진에 문정전의 동측면 일부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그때까지도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 정확한 기록 없이 사라지는데,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조성되는 과정에서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1983년 창경궁을 복원하며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고 1985년 발굴 조사를 시행하여 1986년에 문정전이 복원되었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동궐도 읽기』, 창덕궁관리소, 2005.
- 신지혜, 「조선 숙종대 왕실 상장례 설행공간의 건축특성: 빈전·산릉·혼전을 대상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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