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녕전(孝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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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있던 숙종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같지 않았다. 왕은 개인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지만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대체로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효녕전은 조선의 제19대 왕 숙종의 혼전이다. 숙종은 현종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성왕후(明聖王后)이다. 1720년(숙종 46) 숙종이 승하하자 혼전의 전각명을 ‘효녕(孝寧)’으로 정하고(『경종실록』 즉위년 6월 15일), 5개월 뒤 명릉(明陵)에 장례를 치렀다. 3년의 상제가 끝난 뒤 종묘 정전 제11실에 부묘할 때까지 효녕전에 신주가 봉안되어 있었다.

내용 및 특징

1720년(숙종 46) 6월 8일 숙종이 경덕궁의 정침(正寢)인 융복전(隆福殿)에서 승하하자 자정전(資政殿)에 빈전(殯殿)을 마련하였다. 5개월 뒤 10월에 명릉에 시신을 넣은 관인 재궁(梓宮)을 묻고 반우(返虞)하여 미리 마련한 혼전에 신주를 봉안하였다(『경종실록』 즉위년 10월 21일)(『경종수정실록』 즉위년 10월 21일). 이때 창경궁에 조성한 혼전명이 효녕전이다.

숙종의 혼전은 『숙종빈전도감의궤(肅宗殯殿都監儀軌)』에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에 마련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덕궁 안에 있다고 하여 다르게 서술되어 있다. 혼전이 존재하는 동안 효녕전은 숙종을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였다.

효녕전에서 거행한 의식은 일반적으로 혼전에서 거행하는 의식과 같은 절차를 밟았다. 반우한 날 초우제(初虞祭)를 시작으로 칠우제(七虞祭)까지 우제를 모두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거쳐 연제(練祭), 대상제(大祥祭), 담제(禫祭)를 모두 효녕전에서 거행하였다. 그밖에 조석상식(朝夕上食), 사시(四時) 및 납(臘) 제사, 속절(俗節) 및 삭망(朔望) 제사, 부묘를 하루 앞두고 지내는 동가제(動駕祭)를 효녕전에서 행하였다. 사시는 춘·하·추·동, 납일은 동지(冬至) 후 세 번째 미일(未日), 속절은 정조(正朝)·한식(寒食)·단오(端午)·추석(秋夕)·동지(冬至), 삭망은 초하루와 보름을 말한다.

혼전에서는 그밖에 중국에서 내린 제사와 시호를 받고 분황례(焚黃禮)를 거행하였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중원의 주인이 바뀌면서 숙종의 혼전에는 청나라 사신이 와서 조제(弔祭)와 사시(賜諡) 절차를 거행하였다.

1722년(경종 2) 8월 11일 숙종의 신주를 혼전인 효녕전에서 옮겨 와 태묘에 부묘하였다. 이때 숙종보다 앞서 승하한 인경왕후(仁敬王后)와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신주도 함께 부묘하였다. 따라서 효녕전은 숙종의 신주를 봉안하기 시작한 1720년 10월 21일부터 3년상을 마치고 종묘에 부묘한 1722년 8월 1일까지 창경궁의 문정전에 설치되었다.

변천

혼전은 신주를 부묘한 뒤에는 철거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효녕전이 있었던 창경궁의 문정전은 이후에도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참고문헌

  • 『숙종빈전도감의궤(肅宗殯殿都監儀軌)』
  • 『숙종혼전도감의궤(肅宗魂殿都監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 이현진, 「명·청의 賜祭·賜諡에 대한 조선의 대응」, 『朝鮮時代史學報』6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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