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가)(貿用(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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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아에서 필요한 물건을 시장에서 구입하여 사용하는 것.

개설

무용이란 ‘사서 쓴다’는 일반적인 의미를 넘어 관아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해 사용하는 것을 뜻하였다. 조선시대에 각급 정부 기관에서는 원칙적으로 백성들이 납부하는 공물로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였다. 그러나 이 방법은 운반이나 납기일 준수, 품질 보증 측면에서 문제가 많았다. 또 그 과정에서 수납 기관 서리들의 농간이 발생하였다. 이에 바쳐야 할 공물을 값으로 환산하여 현물 대신 받고 그것으로 사주인(私主人)을 통해 사서 쓰는 방납(防納)이라는 방안이 16세기에 성행하였다.(『중종실록』 38년 1월 16일). 17세기 초부터 이것이 대동법으로 제도화되었고 이로 인해 무용은 조선후기 관아의 일상적인 업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무용은 유통경제의 발전을 전제로 하면서도 그것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소상인들을 억압하여 헐값으로 물품을 구입하거나, 관무를 빙자하여 관속들이 사적인 치부를 도모하는 등의 폐단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공물이나 진상물을 상납받는 경각사나 왕실은 각관으로 하여금 현물 대신 값을 올려 보내도록 하고 이를 바탕으로 민간업자를 선정하여 현물을 구매하여 바치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형태가 있었다. 하나는 지방에서 현물 대신 값으로 올려 보내면 서울 기관에서 사람을 정하여 서울이나 지방에서 무납(貿納)하도록 한 형태였다. 이때 상인·아전·노비·궁속 등이 맡는데 이를 통칭하여 사주인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는 지방에서 값으로 대신 거두어 현물을 인근 지역이나 서울에서 구매하여 납부하는 형태였다. 지방관청에서 필요한 물품도 유사한 형태로 무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변천

무용은 조선초기부터 간헐적으로 시행되었지만, 16세기 이래 수취 체계의 변동과 유통경제의 발달, 그리고 척신 정치(戚臣政治)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더욱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정해진 현물로 내는 본색납(本色納)을 원칙으로 하던 공물이 쌀과 포(布)로 대신 내는 미포대납(米布代納)으로 전환되었다. 그 결과 공물의 상품화와 업자의 세력화가 조성되어 이른바 방납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이로 인해 권세가와 결탁된 무납업자가 큰 이익을 보고 공물을 부담하는 백성들은 큰 손해를 보았다. 이 사실은 사림파(士林派)를 포함한 지식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지적되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무용은 중단되지 않았다. 심지어 지방관청에서는 그것을 나름의 원칙으로 제도화하여 사대동(私大同)으로 정착시켰다. 사대동은 당시 사림파에 의해서도 공감을 얻어 결국 17세기 광해군대에 대동법(大同法)으로 제도화되었다. 그리하여 중앙이건 지방이건 간에 필요한 물품을 무용하는 체제가 더욱 확산되었다.

구매 물자는 시장에서 형성된 가격이나 관아에서 책정한 가격으로 조달되었다.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 형성된 가격을 시가(時價)나 시가(市價)라고 하고, 관아에서 책정해 놓은 가격을 관가(官價) 혹은 상정가(詳定價)라고 하였다.

조선시대에 중앙이나 지방의 각 급 관청은 필요 물건을 구매할 때 대부분 관가에 의해 구입하였다. 중앙관청의 관가는 공인(貢人)에게 지급되었던 공가(貢價)의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처음에는 시가보다 높은 편이었다. 반면에 지방관청의 관가는 보통 시가보다 낮게 책정되었는데, 시가가 관가의 2배 또는 3배나 되어 억지로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따라서 낮은 구매 가격 때문에 소생산자나 소상인이 피해를 입는 문제가 발생하였고, 후일 동학 농민군은 시가대로 구매해 주도록 주장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김덕진, 『조선 후기 지방 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간행위원회 편,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0.
  • 김덕진, 「16~17세기의 사대동에 대한 일고찰」, 『전남사학』 10,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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