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납(貿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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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물품을 대가를 받고 구매하여 관아에 바치는 것.

개설

조선시대에 왕실, 중앙관청, 지방관청은 원칙적으로 필요한 물품을 백성들로 하여금 무상으로 바치게 하여 확보하였다. 그러나 생산이나 운반 및 납기일 등의 문제로 이러한 방침이 원칙대로 적용될 수 없는 물품이 적지 않았다. 이에 받는 기관은 그러한 물품에 대하여 현물 대신 값으로 내도록 하고 그 대가로 민간업자를 선정하여 그 물품을 구매하여 바치도록 하였고, 내야 하는 기관은 현물 대신 값으로 거두어 민간에 대가를 지급하고 구매하여 상납하도록 하였는데, 이를 무납(貿納)이라고 한다. 방납(防納)으로 표현되기도 한 무납은 유통경제 발달을 전제로 하면서 그것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동시에 사적인 치부 행위가 개입되어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내용 및 특징

지방 각 관에서 상납하는 경사 공물이나 왕실 진상의 경우 크게 ① 각 관에서 현물 대신 값으로 올려 보내면 중앙행정 기관에서 사람 즉, 사주인(私主人)인 상인, 아전, 노비, 궁속 등을 정하여 서울이나 지방에서 구매하여 무납하도록 한 형태가 있고, ② 지방 각관에서 값으로 대신 거두어 현물을 인근 지역이나 서울에서 구매하여 무납한 형태가 있다. ①의 경우 1566년(명종 21)에 여러 관사의 아전들이 스스로 주인(主人)이라고 칭하면서 모든 공물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으로 바치게 했다. 만약 스스로 준비한 현물로 바치려는 자가 있으면 온갖 수단으로 중도에 방해해서 여러 고을 사람들이 침해당하는 피해가 끝이 없다고 한다. ②의 경우 1497년(연산군 3)에 제용감(濟用監)에 상납하는 호피(虎皮)를 호랑이를 잡지 못한 고을에서 수령이 주민들로부터 그 값을 거두어 무납하였다. 그런데 1장 값이 면포 30필이던 것이 80필로 뛰어올라 백성들이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지방관청에서 필요한 물품도 대략 이러한 원인과 방법으로 무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변천

무납은 국초부터 간헐적으로 시행되었지만, 16세기에 수취 체계의 변동, 유통경제의 발달, 척신 정치의 전개를 배경으로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본색납(本色納)을 원칙으로 하던 공물이 미포대납(米布代納)으로 전환되어 시중무납(市中貿納)되면서 공물의 상품화와 업자의 세력화가 조성되어 이른바 방납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이것은 사림파를 포함한 지식인들에 의해 끊임없이 지적되었고, 일찍부터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무납은 중단되지 않았다. 아예 지방관청에서는 그것을 나름의 원칙으로 제도화하여 사대동(私大同)으로 정착시켰다. 공물 작미 등으로 표현된 사대동은 이이나 유성룡 및 여론 주도층에 의해서도 공감을 얻어 결국 17세기 광해군대에 대동법으로 입법화되었다. 그리하여 중앙이건 지방이건 간에 소요물을 무납, 즉 민간업자로 하여금 시중에서 구매하여 바치도록 하는 체제가 더욱 확산되었다.

대동법의 실시에도 불구하고 현물납이 100%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점차 하나씩 잡역세로 대가납되어 무납되는 방향으로 바꾸어갔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이 되면 현물납은 대부분 사라지고 거의 모든 관수물은 무납되었다. 이러한 무납의 확산은 결과적으로 유통경제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의의

부역제(賦役制)를 기반으로 한 조선 사회에서 어떤 물품을 대가를 받고 구매하여 관아에 바치도록 한 무납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다. 하지만 16세기에 방납의 형태로 성행하기 시작하더니 대동법이 실시된 17세기 이후 더욱 확산되어 유통경제를 발달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김덕진, 『조선후기 지방재정과 잡역세』, 국학자료원, 1999.
  • 김덕진, 「16~17세기의 사대동에 대한 일고찰」, 『전남사학』 10, 1996.
  • 德成外志子, 「조선후기의 공물무납제」, 『역사학보』 113, 1987.
  • 이지원, 「16⋅17세기 전반 공물방납의 구조와 유통경제적 성격」, 『이재룡박사환력기념한국사학론총』, 1990,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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