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량역(毛良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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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경상도 지역의 역도(驛道) 중 하나인 장수도에 속한 역.

개설

모량역(毛良驛)은 고려시대에는 경주도(慶州道)의 속역으로 경주부에 위치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전국적인 역도-역로 조직이 정비되면서 장수도(長水道)에 소속되어 역승(驛丞)의 통제를 받았다. 이후 조선시대 전기의 역참 제도가 완비된 『경국대전(經國大典)』 체제에서도 기존과 같이 장수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어 갑오개혁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高麗史)』 「병지(兵志)」 참역(站驛) 조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경주도에 소속된 23개 속역 가운데 하나였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고려의 역제가 22역도-525속역 체제로 정비되는 995년(고려 성종 14)에서 1136년(고려 인종 14) 사이에 오늘날의 경주 지역에 설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직 및 역할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 경상도 경주부 조에 따르면, 당시 모량역에는 역리(驛吏) 15명, 역노(驛奴) 20명, 역비(驛婢) 1명과 대마(大馬) 2필, 중마(中馬) 2필, 복마(卜馬) 10필 등 총 14필의 역마가 배속되어 있었다.

변천

조선 건국 후 전국적으로 역도와 역로 조직이 정비되면서 모량역은 장수도의 속역으로 편제되었다. 그 뒤 1457년(세조 3)의 역승 폐지 조치로 찰방의 순시 범위가 넓어지면서 각 역도에 소속된 역의 수가 많고 역 사이의 거리가 멀어 역로가 쇠퇴하는 폐단이 발생하자, 1462년(세조 8)에 대대적으로 역로 개편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모량역은 그대로 장수도에 소속되었으나, 역승이 아니라 찰방(察訪)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세조실록』 8년 8월 5일). 이후 성종대에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확립된 조선시대 전기의 역도 체제에서도 여전히 장수도에 소속되었다. 그에 따라 조선시대 후기까지 장수도의 속역으로 존속하다가, 1896년(고종 33) 1월에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따라 폐지되었다.

『여지도서』 경상도 경주부 조에 따르면, 모량역은 경주부 관아 서쪽 23리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서쪽의 의곡역과는 24리, 서북쪽의 아화역과는 22리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한편 모량역의 명칭은 시기별로 차이가 있는데, 먼저 『고려사』 참역 조에는 모량역(牟良驛)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에 비해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조에서는 모량역(毛良驛)으로 표기하고, "예전에 모량(牟良)이라 하였다."는 설명을 덧붙여 놓았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의 모량역(牟良驛)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모량역(毛良驛)으로 개칭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작성된 「조선총독부 중추원 역원 조사표」에는 모량역(牟梁驛)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지도서』가 편찬된 영조대 이후에 역의 명칭이 변경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조병로, 『한국근세 역제사연구』, 국학자료원, 2005.
  • 정요근, 「고려·조선초 역로망과 역제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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