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童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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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궁중과 지방에서 가무를 담당한 나이 어린 기녀.

개설

연소기(年少妓)·가무여아(歌舞女兒)·창아(倡兒)라고도 한다. 칠팔 세부터 정재(呈才) 등의 가무를 배워 공연에 참여한 나이 어린 기녀로, 일반 기녀와 마찬가지로 기생 명부에 이름이 올랐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정재에 참여했는데, 동기(童妓)가 주역으로 공연한 정재는 연화대(蓮花臺)이다. 그 밖에 검무(劍舞)·선유락(船遊樂)·첨수무(尖袖舞)·학무(鶴舞)에 출연하였다. 동기는 궁중뿐 아니라 지방관아에서도 공연 활동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동기는 주로 노기(老妓), 판수[盲人], 장악원의 관원 등에게서 정재를 비롯한 가무를 배웠다. 태종대에는 나이 어린 창아 6명을 뽑아, 노기 삼월(三月)의 집에서 음악과 풍류를 익히게 하였다(『태종실록』 12년 11월 30일). 또 세종대에는 중천금(重千金) 등 가무여아 5명을 뽑았는데, 기생 6명과 판수 3명이 세 번(番)으로 나누어 날마다 돌아가며 궁궐에 와서 이들을 가르쳤다(『세종실록』 11년 5월 3일).

동기는 칠팔 세 정도의 어린 나이부터 활동을 시작하였다. 19세기에 해주(海州) 기생 명선이 쓴 글에 따르면, 어머니 아버지를 겨우 부르고 저적저적 걸을 때부터 초무(初舞)와 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19세기의 공인(貢人)지규식이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도, 동기 금홍(錦紅)은 8세인데도 재주와 미모를 겸비하여 자라면 경성지색(傾城之色)이 될 만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홍이 황사환상(黃沙還上)이란 노래를 불렀을 때, 비록 목이 확 트이지는 않았으나 얌전하고 우아하며 해맑고 뛰어난 자태를 보였다고 한다.

변천

동기를 선발하는 방법은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가 달랐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조선시대 전기에는 여기(女妓) 150명, 연화대 10명, 의녀 70명을 3년마다 여러 고을의 비녀(婢女) 중에서 나이 어린 자로 골라 선발하였다. 이때 나이 어린 자의 연령이 몇 세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동기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 전기에는 동기를 선발하여 3년간 한양에 상주하게 한 데 비해, 조선시대 후기에 접어들면 연향 때마다 동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렸다. 인조반정 이후에 상주하던 경기(京妓)를 모두 혁파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1829년(순조 29)에는 진찬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진찬 38일 전에 진찬소에서 평안도관찰사에게 문서를 보내 연화대 정재를 공연할 동기를 선발해 보낼 것을 요청하였다. 그에 따라 선발된 동기 2명은 담당자의 인솔 아래 진찬 27일 전에 궁궐에 도착했으며, 여섯 차례의 습의(習儀)를 거쳐 정재를 공연하였다. 그러나 연향에 따라서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정재에 출연할 동기를 지방에서 뽑아 올리지 않고, 의녀와 침선비 중에서 골라 그 역할을 맡기기도 하였다.

동기가 궁중에서 공연한 정재를 시기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고려시대에는 궁중의 연화대 정재에 출연하였다. 『고려사(高麗史)』「악지(樂志)」 부분에 나오는 연화대에 동기가 처음 등장하는데, 연화대는 다른 정재와 달리 동기가 주인공이다. 고운 옷과 모자로 치장한 동기 2명이 두 송이 연꽃 속에 숨었다가, 꽃이 핀 다음에 나타난다. 합립(蛤笠)을 쓰고 단의(丹衣)를 입은 동기가 양쪽으로 나뉘어 춤을 추는데, 동기가 앞에 서고 두 명의 여기가 뒤에 서서 마주 보며 춤을 춘다.

조선시대 전기에도 동기는 궁중에서 정재를 공연하였다. 세종대의 연회에서는 보첨(補簷)에 매어둔 장막의 끈이 바람에 끊어져 처마의 기왓장이 떨어지는 바람에 연화대를 추던 동기가 머리에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세종실록』 7년 12월 29일). 성종대에는 사신을 맞이하여 인정전에서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 동동무를 추었다(『성종실록』 12년 8월 3일).

조선시대 후기의 정재 공연은 연향 의궤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동기는 연화대·선유락·검무·첨수무 등의 정재에 출연하였다. 1744년(영조 20)의 『(갑자)진연의궤』에 따르면, 평안도 성천(成川)에서 11세의 인애(仁愛)와 태매(太梅)가 궁중으로 올라왔는데, 두 사람 모두 연화대 정재에 동기로 출연하였다. 한편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동기의 예비차비까지 치밀하게 준비되었는데, 평안도 안주(安州) 출신의 13세의 원애(元愛)와 16세의 송대운(松臺雲)이 여기에 속하였다. 또 1795년(정조 19)의 『(을묘)정리의궤』에 따르면, 이때는 진찬이 화성에서 열렸기 때문에 화성의 동기가 정재에 출연했는데, 화성의 가차비(歌差備) 중에서 16세의 금례(今禮)와 15세의 복혜(福惠)가 연화대·첨수무·선유락에 출연하였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고종 34) 이후에는 동기의 역할이 좀 더 다양해졌다. 1902년(광무 6) 11월의 『(임인)진연의궤』에 따르면, 동기는 기존에 출연했던 연화대와 선유락의 동기뿐 아니라, 학무의 동기, 검기무의 동기대(童妓隊), 죽간자 등 다양한 역할을 맡았다.

동기의 공연 활동은 지방관아에서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712년(숙종 38) 3월 18일 연경에서 돌아온 사절단 일행을 맞아 김창업(金昌業)이 평안도 정주(定州)에 머물 때, 16세의 가학(駕鶴)과 13세의 초옥(楚玉)이라는 동기가 검무를 추었다. 또 박사호(朴思浩)의 연행 기록인 『심전고(心田稿)』에 따르면, 1829년(순조 29) 3월에 체인각(體仁閣)에서 잔치를 벌였을 때, 선유락 정재와 비슷한 선악유기곡(仙樂維其曲)에서도 동기는 소교(小校)로 분장하여 공연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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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악학궤범(樂學軌範)』
  • 『영조갑자진연의궤(英祖甲子進宴儀軌)』
  •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 『심전고(心田稿)』
  • 『고종임인진연의궤(高宗壬寅進宴儀軌)』
  • 『하재일기(荷齋日記)』
  • 정병설, 『나는 기생이다: 『소수록』 읽기』, 문학동네, 2007.
  • 조경아, 「성천의 동기 강선, 궁중무대에 서다」, 『근대 궁중무의 계승과 변화』, 보고사, 2007.
  •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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