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익(都多益)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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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도다익 |
한글표제 | 도다익 |
한자표제 | 都多益 |
동의어 | 도다익당지(都多益唐只), 도토락당기[道土絡唐只], 도투락댕기 |
관련어 | 도다익장(都多益匠), 주렴(珠簾), 혼례복(婚禮服) |
분야 | 생활·풍속/의생활/제구 |
유형 | 의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윤양노 |
용도 | 장식용 댕기, 대(帶)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도다익(都多益)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성종실록』 13년 2월 12일, 『성종실록』 13년 2월 12일, 『연산군일기』 11년 1월 22일, 『연산군일기』 11년 4월 10일 |
조선시대 여성들의 쪽진 머리 뒤쪽에 드리운 예장용 큰 댕기나 금박용 대(帶).
개설
도토락당기[道土絡唐只], 도다익당지(都多益唐只), 도투락댕기라고도 하는 도다익은 대개 궁중이나 양반 가문에서 신부가 원삼(圓衫)이나 활옷의 혼례복을 입고 족두리나 화관을 쓸 때 쪽진 머리의 뒤쪽에 길게 늘어뜨린 것을 말한다. 『성종실록』에는 ‘도다익대(都多益帶)’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노의(露衣)·장삼(長衫)·원삼 등에 드리운 금박한 대를 말하는 것이다(『성종실록』 13년 2월 12일).
그러나 15~16세기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된 수공업 업종에 도다익장(都多益匠)과 금박장(金箔匠)이 각각 기록되어 있고, 『악학궤범(樂學軌範)』에 회례연(會禮宴)이나 공연을 할 때 착용하는 부용관(芙蓉冠)의 끈에 자황도다익(雌黃都多益)을 쓴다는 기록을 보면, 이때의 도다익이란 돋을무늬판을 사용하여 궁중에서 복식에 금박 문양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조선시대에는 공조(工曹)와 상의원에 각각 2명의 도다익장이 소속되어 있었다.
연원 및 변천
지금까지 도다익이란 용어는 주로 도투락댕기와 관련되어 해석되어 왔다. 도투락댕기는 ‘주렴(珠簾, 朱簾)’이라고도 하는데, 이 주렴이란 용어를 통해 도다익의 의미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주렴은 조선시대 이전에 사용되었던 용어로 고려의 여인들이 머리에 장식했던 붉은색 댕기를 말한다. 훈민정음 창제 이전인 12세기 초에 중국송(宋)의 봉사고려국신서장관이던 손목(孫穆)이 고려어 약 360 어휘를 채록하여 편찬한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염왈박(簾曰箔)’이라 한 것을 보면 고려시대 여인들이 상용했던 주렴은 붉은색 옷감에 금박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서 태조대부터 철종대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주렴은 주로 문이나 교자(轎子)에 드리우는 발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도다익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성종실록』·『연산군일기』·『영조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82년(성종 13)의 기사에 “신정(申瀞)이 한한(韓澗)과 더불어 약혼(約婚)하여 납채(納采)할 때에 금실(絲金)로 수놓은 주홍색의 함(函)에 사라능단(紗羅綾段) 15필과 은(銀) 1정(丁)을 담고서 도다익대홍필단(都多益大紅匹段)의 보자기로 쌌다.”는 내용이 보인다(『성종실록』 13년 2월 12일). 곧 납채 물건을 쌌던 대홍색의 필단으로 만든 보자기에 도다익이 가식(加飾)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505년(연산군 11)에는, “아상복(迓祥服)과 도다익에 드는 금(金)은 공조에 간직한 것이 없으니 사들이게 하라.”는 왕의 전교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도다익을 만드는 과정에서 금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연산군일기』 11년 1월 22일). 같은 해 4월에는 “무릇 연향 및 모든 거둥에 당상 내관(內官)은 대홍탑호(大紅塔胡)를 입으며, 당하 내관은 품질에 관계없이 단령(團領)으로는 아청단자(鴉靑段子)를 쓰고 탑호·철릭[帖裏]으로는 초록남유청단자(草綠籃柳靑段子)를 쓰며, 아상복 및 장구(粧具)에 있어서는 흥청(興淸)은 화금도다익(畫金都多益), 운평(運平)은 화자황도다익(畫雌黃都多益)을 쓴다.”고 전교하는 내용이 보인다(『연산군일기』 11년 4월 10일).
주목되는 점은 아상복에 사용된 화금도다익과 화자황도다익이다. 운평은 여러 고을에 널리 모아 둔 가무 기생을 말하며, 이 중 대궐로 뽑혀 온 기생을 흥청(興淸)이라 했다. 포염사(布染司)에서는 이들이 입을 아상복 제작을 관리하였는데, 1505년 4월의 기록에 흥청은 도다익에 금을 쓰고, 운평은 자황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황은 비소(砒素)와 유황과의 화합물로 채색을 하면 맑고 고운 누른빛을 띠므로 계급이 낮은 이들은 도다익에 금 대신 자황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1752년(영조 28)에 편찬된 『상방정례(尙方定例)』에도 귀인(貴人)·소의(昭儀)·숙의(淑儀)·소용(昭容)·숙원(淑媛) 등의 가례 의복에는 노의(露衣)·장삼(長衫)·원삼(圓衫) 등과 대요(帶腰)·대(帶)·도다익대가 포함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도 도다익대에는 당연히 금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도다익이 도투락댕기의 의미로 사용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에 상궁 4인, 유모 1인, 시녀 4인, 기행 나인 4인을 합하여 13인이 쓸 청상립(靑箱笠) 13부의 매 부당 소요되는 물품 물목에 도다익감으로 길이 6치, 너비 4치짜리 홍주(紅紬) 2편과 뒤끈감으로 길이 4자, 너비 3치짜리 황세주(黃細紬) 1편이 포함된 것을 보면 도다익이란 금박 자체나 혹은 큰 댕기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무늬를 찍기 위한 돋을무늬로 새겨진 무늬판을 지칭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부례(新婦禮) 때 어린이 하인 한 쌍은 초록 당의와 붉은 치마에 칠보족두리를 쓰고 도투락댕기를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머리가 짧은 어린아이들도 예장용으로 도다익을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이후의 유물 중 석주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길이 44.5㎝, 너비 16㎝의 도투락댕기의 경우 어린아이가 사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여기에는 꽃과 박쥐, 나비 등이 금박되어 있다.
형태
현재 남아 있는 도투락댕기들은 대부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정한 크기와 꾸밈 등이 정해지지 않은 다양한 형태들이다. 색은 주로 검정색 공단이나 순인(純仁)과 생고사(生庫紗) 등 사(紗)를 쓰거나, 자주색 비단을 겉감으로 하고 안에는 다홍색의 심을 대어 겉에서 보면 짙은 자줏빛을 띤 것이 대부분이다. 이외에도 어린이용으로 붉은색의 숙고사로 만든 것도 있다.
댕기의 겉면에는 전체에 꽃, 석류, 박쥐, 나비와 길상어문 등을 금박하고 그 위에 석웅황(石雄黃)이나 옥판(玉板), 매미 모양의 밀화 장식을 달거나 각색의 실과 은 칠보 장식을 하여 화려함을 주었다. 길이는 어른 것은 110㎝에서 124㎝, 폭은 19~23㎝까지 다양하고, 어린아이 것은 길이가 45㎝ 전후로 어른 것의 반 정도이고 너비는 16㎝ 전후이다.
만드는 방법은 폭이 10~12㎝, 길이 180㎝의 긴 말뚝댕기를 만들어 좌우 끝으로 부터 중앙을 제비부리 형태로 접어 안쪽에서 부리 끝에서 횡선까지만 공그른다. 겉쪽에서 각각의 위에 금박을 하고 석웅황이나 옥판을 달고 밀화와 칠보 등을 중심에 달아 좌우를 연결한다.
크기와 형태, 문양, 장식 등이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형태를 하고 있어 초기의 금박판으로 문양을 표현하던 것이 반가로 흘러 들어가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주로 사용된 문양을 보면 가장자리에는 기하학적인 사방연속무늬인 만자(卍字)·완자(完字) 무늬가 주로 이용되고, 바탕에는 소화문(小花紋)·선도문(仙桃文)·호접문(胡蝶紋)·연화문(蓮花文)·수복강녕문(壽福康寧文) 등의 길상 문양을 배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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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큰 댕기나 부용관의 영자(纓子) 장식으로 쓰인다. 원삼, 활옷 등 혼례복을 입고 족두리나 화관을 쓰고서 도다익을 뒤에 늘어뜨린다.
참고문헌
- 『계림유사(鷄林類事)』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儀軌)』
- 『조선여속고(朝鮮女俗考)』
- 김영숙, 『한국복식문화사전』, 미술문화,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