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각관제(內閣官制)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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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내각관제 |
한글표제 | 내각관제 |
한자표제 | 內閣官制 |
동의어 | 내각(內閣) |
관련어 | 국무대신(國務大臣), 내각(內閣) 총리대신(總理大臣), 내각회의(內閣會議), 의정부(議政府) |
분야 | 정치/행정/정책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대한제국 |
왕대 | 고종, 순종 |
집필자 | 왕현종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내각관제(內閣官制) |
1895년 2차 갑오개혁 때 주요 정책과 법률을 심의·결정하던 최고 행정기관.
개설
1895년 4월 국정을 총괄하는 최고 행정기관인 내각(內閣) 관제(官制)가 반포되었다. 이로써 내각 총리대신(總理大臣)과 국무대신(國務大臣)이 주요한 법률과 정책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비록 칙령의 공포권은 왕에게 있었으나 법률과 칙령의 초안은 내각 회의에서만 논의할 수 있었다. 안건의 제출자는 각부 대신으로 한정하였다. 이 내각 제도는 1889년 12월 제정된 일본 메이지 헌법에 실려있는 내각 관제의 규정을 거의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과 다른 부분은 삭제되었고, 일본에 비해 개혁 관료의 권한이 강화되어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고종은 1896년 9월 내각 관제를 폐지하고 의정부 관제를 다시 설치하였다. 그러다 1907년 6월 일본이 다시 내각 관제를 시행하여 1910년 8월까지 유지시켰다.
내용 및 특징
1894년 12월 2차 갑오개혁 때 칙령 16호로 의정부를 궁내(宮內)로 옮기고 내각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1895년 3월 말에는 내각 제도를 비롯하여 7부 설치 법령과 시행 규칙 등이 제정·공포되었다.
1895년 3월 25일 칙령 38호가 반포되어 4월 1일부터 내각 관제가 시행되었다. 내각 관제는 기존의 의정부를 대체하는 최고 중앙 행정기관이었다. 이때의 칙령 제1조에는, 내각은 국무대신으로 구성하고 서리대신(署理大臣)도 국무대신에 준한다고 규정하였다. 제2조에는, 국무대신은 대군주(大君主) 폐하(陛下)를 보좌하여 나라를 운영하는 책임을 맡는다고 하여 국무대신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였다. 제3조에는, 내각 총리대신은 각 대신의 수반(首班)이며 왕의 뜻을 받들어 행정 각 부의 통일을 보장한다고 하였다. 또한 모든 중요한 사무는 내각 총리대신과 주임대신(主任大臣)이 보고를 함께한다고 하였다.
제4조에는, 내각 총리대신은 행정 각 부의 처분이나 명령에 대하여 다시 토의해야 한다고 생각되면, 토의를 잠시 중지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내각 회의를 거쳐 왕에게 보고한 뒤 결재를 기다릴 수 있다고 규정하였다. 제5조에는, 내각 총리대신은 관하 관리를 감독·통제하며 칙임관(勅任官)과 주임관(奏任官)의 임명과 퇴직은 내각 회의를 거쳐 왕에게 보고한다고 하였다. 단, 판임관(判任官) 이하는 내각 총리대신이 전담하여 행한다고 하였다. 제6조에는, 내각 총리대신은 내각 회의를 거쳐 그 관하 관리의 품계를 올려주는 등의 문제를 왕에게 보고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내각 총리대신은 행정부의 우두머리로서 행정 각 부의 행정을 총괄하고 관하 관리를 감독하는 것을 주요한 임무로 하였다.
제7조에서는 법률과 칙령은 내각 총리대신과 관계 대신이 직접 결재한다는 원칙을 제시하였다. 제8조에서는 내각 회의에서 결정할 수 있는 안건을 제시하였다. 안건으로는, ① 법률과 칙령안(勅令案) ② 세입(歲入)과 세출(歲出)의 예산과 결산 ③ 국내외 국채(國債)에 관한 사항 ④ 국제 조약과 중요한 국제 문제 ⑤ 각 부서 간의 주관 권한에 대한 쟁의(爭議) ⑥ 신하와 백성의 상소(上疏)로서 특별히 대군주 폐하가 내려보낸 것 ⑦ 예산 외의 지출 ⑧ 칙임관과 주임관의 임명과 퇴출(단, 무관(武官)과 사법관의 임명·퇴출은 이 제한에 해당하지 않음) ⑨ 옛 규정의 존폐·변경, 관청을 없애고 설치하며 나누고 합치며 각 부에 전적으로 소속시킬지의 여부, 정리·개혁에 관계되는 모든 사항 ⑩ 조세를 새로 설치하거나 고치며 그대로 두거나 없애며, 관청 소유의 토지·산림·건물·선박 등 관리·처분에 관한 사항 등으로 규정하였다.
제9조에서는 주임대신은 어떤 조항의 사건이든지 구애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내각 총리대신에게 제출하여 내각 회의를 열 것을 요구할 수 있었다. 제10조에서는 내각 총리대신에게 사고가 있을 때, 다른 대신이 임시 칙명을 받들어 그 사무를 주관할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각 대신에게 병이 있거나 다른 사고가 있을 때에는 각 협판(協辦)이 대신하여 내각 회의에 참석할 수 있다고 규정되었다.
내각은 각 부의 장(長)인 국무대신으로 구성되었다. 이들 국무대신은 내각 회의에서 법률·칙령의 제정·폐지, 개정안 제출 등 법령 제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각 부 내 칙임관과 주임관의 퇴출까지 왕에게 제기할 수 있는 관료 임용 제청권을 가지고 있었다. 내각 회의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모든 국정 사무에 관한 것이며, 토의를 통해 결정하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내각 관제의 규정은 당시 1889년 12월 제정된 일본 메이지 헌법에 실려있는 내각 관제의 규정을 거의 그대로 번역한 것이었다. 제2조에서 국무대신이 왕을 보필하여 국가를 다스릴 책임을 진다는 부분과, 제8조에서 관제·규칙·법률 시행에 관계된 칙령이라고 한 부분은 공통적이다. 다만 제국 회의에서 보내는 인민의 청원이라는 부분과 군기 명령 등에 관해 천황에게 직접 보고된다는 조항은 조선의 규정과 달랐으므로 삭제되었다. 또 일본의 경우에는 메이지천황을 정점으로 하되 내각을 중심으로 하는 개명 관료들이 의회와의 관련 속에서 정치를 운영해 나가도록 규정되었다.
반면에 조선은 명목적으로는 왕을 보필한다고 하지만 내각 회의를 중심으로 개혁 관료들이 독점적으로 정치를 운영해 나가는 것으로 규정되었다. 내각 회의에서는 각부 대신만이 법률의 기안권을 행사하였다. 왕은 내각 회의에 직접 참석하지 않아 주요 국정을 논의하는 과정이나 행정 각 부의 칙령·법률안의 결정 과정을 사전에 알 수 없었다. 고종은 총리대신이나 해당 부서 대신이 내각 회의의 결과를 보고해야만 안건의 내용을 알 수 있었다. 고종은 법령의 제정과 관료의 임면에 대해 아무런 권한을 행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대신들 마음대로 국체를 바꿔 공화정치를 하라고 말할 정도로 커다란 불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895년 4월 1일부로 초대 내각 총리대신에 김홍집이 임명되었다.
변천
1896년 2월 고종의 아관파천으로 갑오 정권이 붕괴하자 고종은 군주권을 회복하는 권력 구조의 개편을 서둘렀다. 1896년 9월 24일 내각 관제를 폐지하고 의정부 관제를 다시 설치하였다. 의정부 회의는 국사 전반에 관한 주요 사항을 논의하는 최고 행정관청이었는데, 왕의 의사를 대변하는 참정·참찬의 직위를 두었다. 의정부 회의에서 통과한 최종 의안에 대해서 찬성을 표시한 표제 수와 관련 없이 왕의 권한으로 재논의를 요청하거나 왕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하여 의정부에 대한 왕의 통제를 강화하였다.
한편 일본 제국주의는 1907년 6월 14일에 대한제국의 최고 행정기관인 의정부 관제를 폐지하고 내각 관제를 다시 반포하게 하였다. 이때의 내각 관제 제3~5조에서는 내각 총리대신의 지위와 역할을 규정하였다. 내각 총리대신은 국무대신의 수반이므로 주요한 공무를 왕에게 직접 아뢰어 명령을 받고 행정 각 부의 통일을 보장·유지하는 것으로 하였다. 내각은 법령안, 칙령안, 예산안, 결산안, 예산 외 지출, 각 부 간 주관 권한의 쟁의, 문·무 칙·주임관의 임명과 퇴출, 서품·서훈, 대사·특사, 기타 각 부 주관 사무를 담당하는 것으로 되었다.
내각 소속 관리로는 서기장관 1명, 법제국장 1명, 외사국장(外事局長) 1명, 서기관 7명, 내각 총리대신비서관 1명, 서기랑(書記郞) 22명이 있어 내각 총리대신을 보좌하였다. 일본은 1910년 8월에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시키면서 내각 관제를 폐지하고 조선총독부로 대체시켰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법령전서(法令全書)』
- 『속음청사(續陰晴史)』
- 『관보(官報)』
- 『일본외교문서(日本外交文書)』
- 국사편찬위원회,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40, 국사편찬위원회, 1986~1994.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42: 대한제국』, 국사편찬위원회, 1999.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43: 국권회복운동』, 국사편찬위원회, 1999.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40: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국사편찬위원회, 2000.
- 송병기·박용옥·박한설 편저, 『한말근대법령자료집』 1~4, 국회도서관, 1970~1972.
- 왕현종,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갑오개혁』, 역사비평사, 2003.
-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박정양 전집』 3, 아세아문화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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