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효(金元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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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36년(중종 31)∼1612년(광해군 4) = 77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때의 문신. 군기시(軍器寺)정(正) 등을 지냈다. 자는 희주(希周)이고, 초명은 김달효(金達孝)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신천군수(信川郡守)김생해(金生海)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경명군(景明君)이침(李忱)의 딸로, 성종(成宗)의 손녀이다. 할아버지는 평양서윤(平壤庶尹)김번(金璠)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김영수(金永銖)이다. 김상용(金尙容)·김상헌(尙憲) 형제의 숙부이기도 하다.

선조~광해군 시대 활동

1573년(선조 6)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8세였다.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음서로 벼슬길에 나가 돈녕부(敦寧府)참봉(參奉)·사축서(司畜署)별제(別提)·선공감(繕工監)참봉(參奉)을 지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상제(喪制)를 마친 후에는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시직(侍直)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28년 2월 7일) 천거하는 자가 있어서 사복시(司僕寺)주부(主簿)에 임명되다가,(『선조실록』 34년 9월 11일) 외직으로 나가서 낭천현감(狼川縣監)이 되었으나, 다시 지방관으로 교체 임명되자 부임하지 않았다. 사직서(社稷署) 영(令)과 평시서(平市署) 영을 역임하고, 군기시 첨정(僉正)과 군기시 부정(副正)· 군기시 정으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오랫동안 군기시를 떠나지 못하였는데, 김원효가 업무에 능숙하다고 평가되었기 때문이다.[『청음집(淸陰集)』 권31 「중부군기사정묘갈명(仲父軍器寺正墓碣銘)」]

한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와의 사이에서 낳은 차녀가 김강재(金强哉)와 혼인을 하였는데, 김강재는 1612년(광해군 4) 발생한 <김직재(金直哉)의 옥>에 당사자인 김직재의 동생이었다. 이로 인하여 김원효와 그의 아들 김상준(金尙寯)은 각각 군기시 정과 형조 참판(參判)에서 체차되었다.(『광해군일기』 4년 4월 18일)

성품과 일화

천부적인 자질이 단아하고 묵중하였으며, 세련되고 통달하였으며, 정밀하고 민첩하였다. 일을 헤아리는 데 능숙하고 밝아서, 처음을 보고 결말을 알았을 정도였다. 관청의 크고 작은 경비를 먼저 적절하게 책정하여, 한 해 안에 쓰는 데에 항상 부족하거나 풍족하게 한 적이 없었다. 집안 살림도 알맞게 꾸려서, 봄철에 다른 사람에게 양식을 구걸하지 않도록 하였다. 김원효는 관직에서 일할 때 정사를 아주 신중하고 자상하게 살펴, 아랫사람을 가혹하게 꾸짖거나 매질 한 적이 없었는데도, 아전과 장인(匠人)들이 온 마음을 다해 한결같이 그의 지시에 따랐다. 그리고 김원효는 일을 판단하는 능력이 귀신과 같이 정확하여, 동료 관원들이 공경하고 꺼리면서 마음으로 승복하였다.

군기시 부정으로 있을 적에는 군기시에서 군사 물자를 공급하는 데에 자질구레한 일이 아주 많았다. 군기시의 여러 동료 관원들은 대부분 무관(武官) 출신 관리들이었으므로, 간교한 아전 무리들이 제멋대로 술수를 부리고 농간을 부려도 이것을 제대로 감독하지 못하다가, 번번이 감독자가 탐오죄에 걸려서 낭패를 당하고 관직을 떠나갔다. 그러나 김원효는 군기시 부정이 되자 아전들의 농간을 막고, 자신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창고에서 출납한 군용 물자 가운데 남은 것은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반드시 장부에 기록하고 반납하였으므로, 군기시의 회계가 해마다 불어났다.[『청음집』 권31 「중부군기사정묘갈명」]

김원효는 어머니 이씨(李氏)를 섬길 때에 한결같은 그 뜻을 공손하게 받들었다. 또 항상 집안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시장에 새로운 농산품이 나왔다고 들으면 반드시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먼저 사와서 맛난 음식을 만들어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집안 자손들도 김원효의 뜻을 받들어 비록 공무로 인해 멀리 나갔더라도 한 가지 맛 좋은 농산물을 구해 와서 번번이 먼저 바쳤다.

그의 형인 김대효(金大孝)가 경상도삼가현감(三嘉縣監)으로 나갔다가 임소에서 죽었는데 아들이 없었다. 김원효는 초상 장사를 지내려고 6월의 한여름 더위에 천리 길을 달려갔는데, 날씨가 더워서 입안이 다 헐어서 미음조차 먹을 수가 없었다.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반장(返葬)하여 상구(喪柩)를 따라와서 양주(楊州)에 장사지냈다. 그의 막냇동생 김극효(金克孝)와 더불어 모두 팔순에 이르도록 살았는데, 형제의 우애가 날이 갈수록 더하여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나누어 먹었고, 혹은 질병에 걸려서 한 달 가까이 서로 만나 보지 못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그리워해 마지않았다.[『청음집』 권31 「중부군기사정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 동쪽 도혈리(陶穴里)의 선영에 있는데, 김상헌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비문] 현재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에 있다.

부인 전주 이씨는 충의위(忠義衛)이승열(李承說)의 딸인데,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다. 외아들 김상준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와 형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장녀는 사헌부 감찰(監察)허제필(許霽弼)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김강재에게 시집갔다.[『청음집』 권31 「중부군기사정묘갈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청음집(淸陰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지퇴당집(知退堂集)』
  • 『죽소집(竹所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