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경(金升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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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김승경 |
한글표제 | 김승경 |
한자표제 | 金升卿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조~성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현보(賢甫)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30년(세종 12) |
사망 | 1493년(성종 24) 3월 18일 |
본관 | 경주(慶州)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인천(仁川) 주안리(朱岸里) |
증조부 | 김곤(金稇) |
조부 | 김중성(金仲誠) |
부 | 김신민(金新民) |
모_외조 | 남영 홍씨(南陽洪氏) : 홍수명(洪守命)의 딸 |
처_장인 | 밀양 박씨(密陽朴氏) : 박준(朴峻)의 딸 →(자녀) 3남 1녀 |
자녀 | (1자)김전(金琠) (2자)김영(金塋) (3자)김서(金瑞) (1녀)이숭우(李崇禹)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김승경(金升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6년 8월 17일, 『세조실록』 11년 7월 14일, 『성종실록』 2년 윤9월 22일, 『성종실록』 6년 8월 7일, 『성종실록』 8년 1월 13일, 『성종실록』 8년 7월 17일, 『성종실록』 8년 8월 17일, 『성종실록』 9년 11월 14일, 『성종실록』 10년 10월 25일, 『성종실록』 12년 12월 13일, 『성종실록』 13년 윤8월 22일 |
총론
[1430년(세종 12)∼1493년(성종 24) = 64세]. 조선 전기 세조(世祖)~성종(成宗)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와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자는 현보(賢甫)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지사(知使)김신민(金新民)이고,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홍수명(洪守命)의 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개국공신(開國功臣)인 계림군(鷄林君)김곤(金稇)이다. 이재(吏才)에 뛰어나서 성종의 사랑을 받았는데, 특히 옥사(獄事)를 공평하고 민첩하게 처결하여 칭송을 받았다.
세조~성종 시대 활동
1456년(세조 2) 식년(式年) 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7세였다.[『방목(榜目)』] 그는 급제하기 전부터 재주가 있다는 이름이 났고, 벼슬하고 나서부터 현명하다는 명망이 있었다.[『허백정집(虛白亭集)』 권3 「형조참판김공묘명(刑曹參判金公墓銘) 이하 「김승경묘비명」으로 약칭」]
세조 때 당하관(堂下官)으로 형조 정랑(正郞)과 호조 정랑을 역임하였고, 성종 때 종부시(宗簿寺)정(正)·봉상시(奉常寺) 정·사헌부 집의(執義) 등을 지냈다.(『세조실록』 6년 8월 17일),(『세조실록』 11년 7월 14일),(『성종실록』 2년 윤9월 22일),(『성종실록』 6년 8월 7일),(『성종실록』 8년 1월 13일) 당상관으로 병조 참의(參議)를 지냈으며,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여러 번 옮겨서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이르고 승정원 도승지로 영전되었는데, 왕명의 출납을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다.(『성종실록』 8년 7월 17일),(『성종실록』 8년 8월 17일),(『성종실록』 9년 11월 14일),(『성종실록』 10년 10월 25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거쳐 세 번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였는데, 그때마다 조정의 기강을 숙정(肅正)하였다.(『성종실록』 12년 12월 13일),(『성종실록』 13년 윤8월 22일) 외직으로 나가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고, 내직(內職)으로 들어와서 호조 참판(參判)·예조 참판·공조 참판·형조 참판이 되었다. 김승경은 성종 때 중요한 관직을 맡아서 명성에 걸맞는 실적이 있었으므로, 성종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김승경묘비명」]
성품과 일화
김승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으며, 행동이 신중하고 민첩하였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종족(宗族)을 인애(仁愛)로 대우하며, 벗에게 신의가 있어서 인륜을 져버리지 않았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정사를 처리할 때 신중하였다. 이재가 뛰어났는데, 특히 옥사를 판결하는 데에 능하였다. 나라에서 죄수를 심의하여 처결할 때 의심스러운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김승경에게 맡겨 의혹을 밝히도록 하였는데, 김승경은 기꺼이 옥사를 맡아서 공정하고 민첩하게 처리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평생토록 옥사를 맡아서 현명하게 처리하는 수고를 하였으므로, 그 자를 현보라고 하였다.[「김승경묘비명」]
승정원에 있을 때에 여러 승지들은 모두 은대(銀帶)를 매는데, 성종은 특별히 김승경에게 금대(金帶)를 하사하여 허리에 매게 하였다.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을 때 성종이 그 직무를 잘 수행하는 것을 훌륭하게 여겨 수찰(手札)을 내려서 격려하기를, “경이 내 마음을 알고, 내가 경의 뜻을 안다”고 하였다. 임금과 신하가 서로 크게 뜻이 맞았는데, 김승경의 품계가 참판에 머물고 판서(判書)에 오르지 못한 것은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죽은 뒤에 성종 때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던 것이 도리어 화근이 되어서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연산군(燕山君)의 생모 윤씨(尹氏)를 폐비(廢妃)하는 데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의 추형(追刑)을 받았다.[「김승경묘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인천 주안리(朱岸里)의 언덕에 있는데, 홍귀달(洪貴達)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김승경묘비명」]
부인 밀양 박씨(密陽朴氏)는 박준(朴峻)의 딸인데, 자녀는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김전(金琠)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輔德)을 지냈고, 차남 김영(金塋)은 사옹원(司饔院)봉사(奉事)를 지냈으며, 3남 김서(金瑞)는 상서원(祥瑞院) 부직장(副直長)을 지냈다. 딸은 참봉(參奉)이숭우(李崇禹)에게 출가하였다.[「김승경묘비명」]
참고문헌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허백정집(虛白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