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사(經歷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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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에서 조선초기에 도평의사사의 속사로 설치되어 운영된 관서.

개설

고려말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직제를 확대·정비하는 과정에서 1390년(고려 공양왕 2) 경력사를 설치하였다. 한편 이와는 별개로 같은 시기에 각 도에도 관찰사 밑에 경력사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지만, 이것이 관찰사에 소속된 하나의 관서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지 관찰사를 보좌하는 수령관(首領官)경력(經歷)도사(都事)를 두었다는 것인지 확실치 않다. 이후 관찰사와 관련해서 경력사가 사료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후자였던 것 같다. 그러나 도평의사사에 소속된 경력사는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에 정한 문무백관의 관제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도평의사사는 1279년(고려 충렬왕 5)에 고려초 이래로 운영되고 고종 말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과 중추원(中樞院)의 2품 이상 관원이 합좌하여 국방·군사문제는 물론 국정 전반을 의논하고 결정한 도병마사(都兵馬使)가 개칭·개편되면서 성립되었고, 모든 국정을 논의·결정함은 물론 육조의 기능까지 수행하였다. 이에 따라 도평의사사는 그 확대된 기능과 집행을 위하여 실무를 담당할 행정기구가 필요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육색장(六色掌)이 설치되고, 이어 육방녹사(六房錄事)로 개칭되면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러다가 1390년(고려 공양왕 2) 속사로 경력사(經歷司)를 설치하고 여기에 3·4품의 경력(經歷) 1인과 5·6품의 도사(都事) 1인을 두어 육방녹사를 통할하면서 도평의사사의 모든 실무를 관장하였다.

조직 및 역할

처음 경력사를 설치하면서 3·4품의 경력과 5·6품의 도사를 모두 문신으로 각기 1명씩 두어 전곡의 출납을 감독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1390년(고려 공양왕 2) 11월에 전(前) 낭장(郎將)곽흥안(郭興安)이 경력사의 인첩(印牒)을 위조하여 의복과 쌀, 콩을 받아 기생첩에게 주었다가 발각되었다. 이것으로 보아 경력사의 허락이 없으면 전곡의 출납이 불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경력사 밑에는 육방의 녹사가 있어 실무를 담당하였다. 또 각 식년(式年)의 잡업(雜業)에 공거(貢擧)된 자로서 벼슬에 나아가지 않은 자를 7·8품의 전리(典吏)로 삼아 서사(書寫)를 맡겼다.

조선 건국 후에 설치된 경력사의 조직도 고려와 거의 유사하였다. 경력과 도사 각 1명을 겸관(兼官)으로 임명하였고, 육방 녹사 각 1명과 7품의 전리 6명을 두었다(『태조실록』 1년 7월 28일).

변천

조선은 개국과 함께 고려말의 경력사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 후 1400년(정종 2)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 중심의 정치를 도모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관제를 개편할 때 먼저 도평의사사가 의정부로 개편되었고, 이어 1401년(태종 1) 문하부(門下府)가 혁파되고 삼사(三司)는 사평부(司平府)로,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승추부(承樞府)로 개칭되었다. 이로써 도평의사사는 해체된 셈인데, 이 과정에서 경력사는 의정부 속사로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양촌집』에 의하면, 1403년(태종 3) 여름에 의정부 경력사(經歷司) 도사(都事)인 서선(徐選)이 이천(利川)에 새로 지은 향교의 기(記)를 써 달라고 권근(權近)에게 부탁한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일이 있은 직후인 같은 해 7월에 의정부의 경력과 도사를 혁파하고 내서사인(內書舍人)을 의정부 사인으로 고치면서 서선을 사인으로 임명하는 조치가 있었다(『태종실록』 3년 7월 16일). 이로써 경력사는 완전히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양촌집(陽村集)』
  • 김광철, 「고려 후기 도평의사사 연구」, 『한국중세사연구』5, 1998.
  • 장병인, 「조선 초기의 관찰사」, 『한국사론』4, 1978.
  • 한충희, 「조선 초기 의정부 연구(상)」, 『한국사연구』31,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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