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과처
서시과처(徐市過處)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불노초 란?: 제주도 한라산(영주산)에 있는 시로미, 영지버섯, 당귀라고 한다.)
제주도 정방 폭포 각석에 새겨진 서불과지(徐市過之)는 서귀포에 전해오는 서복(서불)(徐市 서복(徐福)이라고 함)에 대한 전설은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라는 마애명으로부터 비롯된다.
이것은 진시황의 사자인 “서불(徐市)”이 시황제의 불노장생을 위하여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오백명(혹은 삼천명)과 함께 대신단을 이끌고 불로초가 있다는 삼신산(주1)의 하나인 영주산(한라산)을 찾아 향해를 하였다.
영주산의 제일경인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린 서불은 영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한 후 서쪽으로 돌아갔다. 서불이 돌아가면서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라는 글자를 새겨 놓았는데, 서귀포(西歸浦)라는 지명도 여기서 유래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서귀포 서복 기념관은 이러한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한 곳이다. 파한록(破閒祿 上-김석익 저)에는 『귀포해안 절벽에 진나라 방사인 서불(徐市)이 새겨 놓았다는 글자 흔적이 있는데, 백락연(白樂淵)제주 목사(1877.1~1881.5)가 이러한 말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그려오게 하였다. 글자를 살펴보니 전부 12자 였는데 과두문자여서 해독 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 만약 서복이 불로초(황기)를 구하려 우리나라에 왔다면 대부분 서불과차라는 각서이 발견 된 곳은 남해, 거제, 제주 등지로 바닷가에 각석이 있는것으로 보아 배를 타고 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진나라 재상 서복(徐福)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인물. 자는 군방(君房), 서불(徐巿)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기원전 219년, 방사로 진시황에게 중용되었고, 이후 명령을 받아 어린 남녀 수천명을 데리고 동쪽으로 가서 불로초를 구하러 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의 탐험은 두번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보이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제나라 사람 서불(徐巿) 등이 글을 올려 "바다에 봉래(蓬山), 방장(方丈), 영주(瀛洲)라는 삼신산에 신선이 살고 있습니다. 청컨대 목욕재계하시고, 어린 남녀 아이를 데리고 신선을 찾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서불을 보내 어린 남녀 아이 수천 명을 선발하여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게 했다. - 진시황본기, 진시황 28년
시황이 대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에 천하의 쓸모없는 책들을 거두어 모두 불태우게 하고, 학자와 방사들을 아주 많이 모조리 불러 모아 태평을 이루려 했더니 방사들이 단약을 구워 기이한 약을 만들자고 했다. 지금 듣자하니 한중(韓衆, 한종)은 가더니 소식이 없고, 서불 등은 거금을 쓰고도 끝내 약을 구하지 못했다. 간사한 놈들이 서로 이익을 챙기고 고발한다는 말만 날마다 듣고 있다. 노생 등을 내가 존중해서 잘 대했거늘 지금 나를 비방하며 나의 부덕을 무겁게 하고 있다. 함양에 있는 이런 방사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요망한 말로 검수(黔首)를 어지럽히는 자들도 있었다." - 진시황본기, 진시황 35년
방사 서불 등은 바다로 가서 선약을 구하길 몇 해가 지나도록 구하지 못하고 비용만 허비하자 문책 받을 것을 두려워해 거짓으로 "봉래의 선약은 구할 수는 있으나 커다란 상어 때문에 늘 어려움을 당하다보니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활 잘 쏘는 사람을 함께 보내 상어를 보는 즉시 연속 발사되는 석궁을 쏘면 됩니다"라고 했다. - 진시황본기, 진시황 37년
서복(徐福)을 바다로 나아가게 하여 신기하고 기이한 물건들을 구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온 서복이 말했습니다.
『신이 바다 한 가운데서 대신(大神)을 보았는데 말하기를 '너는 서쪽 땅 황제의 사자가 아니더냐?'라고 물어서 신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대신이 '무엇을 구하려고 왔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복용하면 수명을 더하여 연장할 수 있는 신약을 찾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이 말했습니다. '너희 진왕은 예의가 박하여, 그 약을 볼 수는 있으나 얻어서 복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신이 즉시 그 대신을 따라 동남쪽의 봉래산에 이르러 영지(靈芝)로 이루진 궁궐을 보았는데 구리빛을 띤 용의 형상을 한 사자가 나타나 하늘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신이 재배하고 '마땅히 무엇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해신이 대답하기를 '양가집 사내 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백공(百工)을 바치면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진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동남 동녀 3천 명과 오곡의 각종 씨앗과 백공들이 만든 물건들을 가져가게 했습니다. 서복은 비옥하고 넓은 평원을 얻자 그곳의 왕이 되어 그곳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회남형산열전
서복의 이후 행보는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불로불사의 영약을 구하기 위해 먼 바다로 떠났다는 신비로운 소재를 후세 사람들에게 만들어줘서, 서복이나 불로불사를 다루는 창작물에서 서복이 진짜로 영약을 구했다는 설정이 자주 쓰인다. 아니면 당시 진시황의 무리한 만리장성 건설과 분서갱유등의 악명을 떨치고 본인에게 불로초를 찾거나 수은을 먹거나 하는 불사에 대한 집착을 한 행적도 있었다 보니 점점 제정신이 아닌 시황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불로초를 찾는 빌미로 영원히 도주했다는 설도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서복 자신이 불로불사를 누렸다기 보다는, 어른의 사정으로 다른 이들이 그 혜택을 보았다는 얘기가 많다. 대표적으로 장예모의 영화 진용이나 성룡과 김희선이 나온 영화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등이 있다.
서복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본기 뿐만 아니라 사기의 '회남형산열전', 진수의 정사 삼국지, 후한서 등에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서복은 은중국을 떠나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하였다고 나오는데, 중국에서 이주(夷洲)는 지금의 타이완을, 단주(亶洲)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복은 처음부터 불로초를 찾을 수 없음을 알고 아예 진시황의 손아귀를 벗어나 자기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부러 용왕의 명을 빙자하여 어린 남녀 수천 명과 각종 기술자들을 요구하여 데리고 떠났으며, 동쪽 어느 섬에 자기의 왕국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쪽으로 간 이후의 행방에 대한 전설로는 그가 일본, 대만 또는 제주도에 도달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서복에 관한 전승은 동아시아 해안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 즉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전설도 있다.
동쪽으로 흘러간 뒤에 왕국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게 어느 나라인가는 실존이 불분명하다. 탐라국, 야마타이국, 야마토 왕국 등의 추정이 있기도 하고 아예 나라를 못 세웠을 수도 있지만,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그게 일본이라는 풍문이 있었던 듯. 17세기 조선 문인 박인로의 '선상탄'에 보면 '진시황 때문에 서복이 일본에 나라를 세워서 그 후손들이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이게 다 진시황 탓이다!'하고 탄식하는 구절이 있다. 또한 간양록에서 강항은 일본의 역사를 둘러보며 '일본에 서복이 도래했다는 설화는 있고 제사도 지내긴 하는데 세상사람들이 말하는것처럼 서복의 후손이 지금의 왜황이 된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인식은 현대 중국에도 남아있는지 장위안은 "서복 일본 건국 썰"을 비정상회담 방송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당시 장위안의 한국어 말주변이 많이 부족해서 방송에선 그냥 '흔한 중국인의 어거지'로 연출되었는데 역사라기보단 그냥 한국의 연오랑과 세오녀처럼옛날부터 있었던 민담 중 하나 정도다.
서복에게 불로초를 찾게 한 것이나 서복에 관련된 전설이 있는데, 대완국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길가에 널브러져 있었다. 까마귀가 여러 차례 풀을 물고 와서 죽은 사람의 얼굴에 덮으면 모두 살아나자 관리로부터 진시황에게 알렸으며, 진시황이 사신을 보내 풀을 가져가서 귀곡자에게 물었다. 귀곡자는 동해의 조주에서 자라는 불사초로 경전에서 자라 양신지라고도 부른다고 이야기했으며, 진시황은 이 풀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서복을 보냈지만 서복은 조주를 찾아 떠난 뒤에 돌아오지 않아 나중에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중국 동쪽 바다로 불로초를 찾아나섰다는 전설 때문에 실제로 중국 동쪽에 있는 한국과 일본의 여러 해안가 지역에는 서복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 많이 있다. 한국은 제주도 서귀포시에, 일본은 사가현에 서복 전시관이, 와카야마현에 서복공원과 서복의 무덤이 있다. 서귀포는 도시 이름부터가 서복이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오른 포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며,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이 많고 중국인들 중 진시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보니 중국인 관광객이 오면 서복 불로초 일화는 관광 가이드의 멘션에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 실제로 제주도에 귤은 자라도불로초가 자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불로초 전설이 있을 정도로 제주도가 땅 좋고 물 맑은 청정지역이다라는 식으로 마케팅으로 써먹는 것도 있다.
일본의 소설 춘설궁장월에는 서복이 하치조지마에 남여 1000명을 데리고 상륙해 불로초를 찾으러 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쿠마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방폭포에는 서복이 다녀갔다는 의미의 서불과지(徐巿過之)는 글자가 폭포 옆에 새겨져 있다. 이 글자 자체는 2000년대 초에 중국인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주변 정리 사업을 할 때 새긴 것이며 원래는 폭포 절벽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2011년에 서귀포에서 글자를 찾아보겠다고 폭포 주변을 정밀 탐색했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서귀포에서 유배 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가 이 글자를 탁본으로 남겨놨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현재 탁본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사진으로만 남아있으며 정방폭포와 서복 기념관에 있는 글자는 이 사진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또한 1877년에 제주 목사로 부임한 백낙연(白樂淵)이 순시 중 정방폭포에 들렀을 때 서복 전승을 듣고 사람을 시켜 탁본을 했는데 올챙이, 벌레, 새 모양과 비슷한 12개의 글자였으며 중국의 고대 문자여서 해석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원본 글자가 근래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 외 다른 지역에도 서복 전승이 있는데 거제시 해금강에는 서복이 이곳에 잠시 머물 때 남겼다는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글자가 절벽에 새겨져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남해군 금산에도 서불과차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금산에 있는 글자는 서복 전승과 관련된 것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인데 다만 이것이 "글자"인지 "그림"인지 불분명하며 글자라고 해도 서불과차가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글자의 전체적인 모양 자체는 김정희의 탁본 사진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일단 남해군은 서복과 관련이 있다 보고 계곡 입구에 서복상을 세워두었다. 부산광역시 영도구의 봉래산에도 서복 관련 전승이 있다.
심희가 도를 깨우치자 서복이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이때 서복은 백호가 모는 수레, 사마생은 용이 모는 수레, 부연은 흰 사슴이 모는 수레를 타고 함께 심희를 맞이해 하늘로 올라갔고 이 때부터 사람들이 서복이 득도해 신선이 된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나라 때 등주의 바닷가에서 여러 사람들이 서복에게 배알했는데, 어떤 선비가 어떤 부인에게 그 광경에 대해 묻고 서복인 줄 깨닫자 사건에 대한 것과 병을 치료해줄 것을 청했다. 이때 서복은 선비에게 좋은 밥을 주었는데, 선비는 적다고 했지만 서복은 그 밥을 다 먹으면 또 주겠다 하면서 아마도 다 못 먹을 것이라 했다. 선비가 밥을 연이어 여러 술 삼키자 여러 그릇을 먹은 듯이 배가 불렀고 작은 그릇에 담긴 술을 마시자 곧 취했다. 다음날 그 선비에게 검은 환약을 여러 알 먹게 했다. 선비가 약을 다 먹자 검은 물과 같은 설사를 여러 번 하고 병이 바로 나았다. 선비가 남아서 섬길 것을 청하자 관직에 있기에 이 곳에 남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그 선비에게 노란 약 한 자루를 주면서 돌아가서 아픈 사람을 만나면 도규(刀圭. 약을 드는 약숟가락)로 조금만 떼어먹으라 했다. 서복은 선비를 등주로 보냈고 선비는 당현종에게 약을 헌상하며 이 일을 아뢰었다. 현종이 병이 있는 사람에게 복용케 하자 모두 다 나았다.
한국의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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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목차
- 1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 2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 3 서귀포(西歸浦)
- 4 서불과차(徐不過此)
- 5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
- 6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7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8 구암서원(龜巖書院)
- 9 숭현사(崇賢祠)
- 10 풍석문화재단(楓石文化財團)
- 11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 12 서련(徐憐) 판관 사적비(事跡碑) 건립
- 13 행림서원(杏林書院)
- 14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 15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 16 숭렬전(崇烈殿)
- 17 온조왕묘(溫祚王廟)
- 18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 19 삼충제(三忠祭)
- 20 육현사(六賢祀)
- 21 같이 보기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구암서원(龜巖書院)
구암서원(龜巖書院)은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산격동)에 있는 서원이다. 1975년 2월 5일에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 1982년 3월 4일에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구계 서침(徐沈)의 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서침(徐沈)은 고려말∼조선초의 변혁기에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노력하였다.
숭현사(崇賢祠)
先賢(선현)을 높이 받들어 제향하는 사당으로써 1665년(현종 6년)에 연구산(連龜山)에 세워졌는데, 1718년(숙종 44년)에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229번지로 이건하였다.
현재는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산격동)의 구암서원 내에 있다.
숭현사의 중앙에는 서침(徐沈)과 서거정(徐居正)의 위패가, 오른쪽에는 서해(徐嶰), 왼쪽에는 서성(徐渻)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풍석문화재단(楓石文化財團)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선생(1764~1845)은 영조와 정조 시절에서 순조, 헌종 대에 이르기까지 농업개혁을 통한 생산력 증대와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해 민생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다산 정약용 선생과 함께 조선 후기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보성군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활동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송재 문화제'를 개최했다.
서련(徐憐) 판관 사적비(事跡碑) 건립
제주목판관(濟州牧判官) 서련(徐憐)은 중종 8년(1513) 약관(弱冠)의 나이로 제주판관(濟州判官)에 부임한 후 김녕사굴(金寧蛇窟)의 뱀에게 해마다 어린 처녀를 제물로 바쳐 오던 미신과 폐습을 퇴치한 선정관(善政官)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행림서원(杏林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에 있는 조선전기 서익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1570년(선조 3)경 지방유림이 서익(徐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이소(李韶)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광복이 되자 유림이 복원을 결의하고 복원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1966년에 서원이 복원되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육현사(六賢祀)
천안시 풍세면 풍서 5리에 있는 육현사(六賢祀)에서는 조선 시대의 선비 유언겸(兪彦謙)·이승벽(李承璧)·현덕승(玄德升)·서정연(徐挺然)·이중명(李重明)·서한주(徐漢柱)를 모시는데,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