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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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沙川) 서창경(徐昌鏡)

1726년(영조2)~1799년(정조23).

자 정보(正甫). 호 사천(沙川). 생원(生員) 서만유(徐萬維)의 아들. 본관은 달성 서씨.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음.

공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독실하여, 책을 읽고 글자를 묻는 일 외에는 반드시 부친께 여쭈고 나서 행동을 결정하였음. 아버지 만유가 그런 공을 평하기를 “이 아이의 자성(資性)은 스승을 따라 학문을 해낼 수 있겠다.”고 함. 14세에 부상(父喪)을 당하였을 때에, 관 앞에서 호곡하고 애통해 하기를 충심으로 하였다가, 며칠이 지나자 혼절하기도 하였음.

같이 놀던 이웃 아이가 가난하여 겨울옷을 지어 입을 형편이 못되었는데, 공이 새로 지은 겨울옷을 벗어주니, 공의 어머니가 헌옷을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하자, “저는 옷이 해지면 고쳐도 되지만, 저 아이는 고칠 방도도 없습니다.”라고 하며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였다고 함.

같이 놀던 이웃 아이가 가난하여 겨울옷을 지어 입을 형편이 못되었는데, 공이 새로 지은 겨울옷을 벗어주니, 공의 어머니가 헌옷을 주어도 괜찮지 않을까라고 하자, “저는 옷이 해지면 고쳐도 되지만, 저 아이는 고칠 방도도 없습니다.”라고 하며 어머니의 허락을 구하였다고 함.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기고, 더욱 어머니께 효성을 다하여, 자식으로서 어머니의 마음을 잘 미루어 체득하여 모심. 공이 노년에 모상(母喪)을 당하자, 여름에도 상복을 벗거나 부채질을 하지 않았으며, 겨울에는 옷을 두껍게 껴입거나 따뜻한 곳으로 나아가지 않았음.

공은 평소에 ‘장경(莊敬)’을 위주로 하여, 일찍이 말하기를 “경(敬)이라는 한 글자는, 이 마음을 부지런히 경계시켜서 늘 깨어 있고 어둡지 않게 하는 것이니, 곧 마음을 다스리는 제일의 공부이다.”라고 하고, 아울러 일상(日常)의 행위에서 실천하고 익숙하게 하는 공부를 강조하였음.

일찍이 과거 공부를 한 적이 있었으나, 1762년(영조38) 이후에는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 이후 대나무, 국화, 파초(芭蕉)를 심어 뜻을 깃들였고, 봄가을 경치가 좋을 때는 산책을 하며 시를 읊조리면서 담박한 마음을 지녔음.

공의 선조이자 경태(景泰) 연간의 유일(遺逸)로 명성이 있던 돈암(遯菴)의 유사(遺事)를 공의 족형(族兄)인 오산(梧山) 창재(昌載)와 더불어 수집하고, 당세의 큰 학자에게 묘지(墓誌)와 묘표(墓表)를 청하기도 함. 또한 문중전수록(門中傳守錄)을 편집하여, 초기 조상들이 남긴 시와 뇌문(誄文) 및 관련된 읍지와 묘지의 기록을 모으고 일록(日錄) 등 관련 자료를 수집함.

공은 홀로 영월(寧越)에 들어가 금강정(錦江亭)과 청령포(淸泠浦) 사이를 주유(周遊)하면서 단종(端宗) 관련 유적지를 보고 돌아오기도 함.

공은 독서에 있어 사서(四書)를 위주로 하고, 반드시 자구(字句)마다 정밀하게 공부하였음. 만년에는 대산(大山) 문하에 나아가 의례(疑禮)를 강론하였음.(대산집에 「答徐正甫昌鏡別紙」 등 논례(論禮)한 편지가 실려 있음) 또 박손경(朴孫慶)・유장원(柳長源)과 더불어 반복하여 고증하였음. 일찍이 거문고를 만들고는, 도잠(陶潛)의 ‘무현금(無絃琴)’의 뜻을 취하여 이를 “아금(啞琴)”이라 명명하며 회포를 달랬다고 함.

문집이 있음. 만곡(晩谷) 조술도(趙述道)가 「處士徐公行錄」을 찬함.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2]]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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