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환
아버지: 서인순(徐璘淳, 1835. 4. 17 ~ 1899. 11. 12)
형제는 서상두(徐相斗) 서상엽(徐相曄) 서상건(徐相建) 서상환(徐相懽)
본관은 대구 서씨이다.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14대조이다.
서상환(徐相懽)
일제강점기 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정부 관료. 서상환(徐相懽)[1888~1968]은 1888년 9월 24일 지금의 경상남도 통영시에서 태어났다. 1910년대 재건 달성친목회에서 활동하였으며, 광복 후에는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활동 사항]
서상환은 일본 도쿄[東京]로 유학하여 니혼대학[日本大學] 전문부 법과를 졸업하였다. 1915년 1월 15일 대구 안일암(安逸庵)에서 서상일(徐相日) 등과 함께 재건 달성친목회[조선국권회복단]를 결성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대구를 방문하여 서상일·윤상태(尹相泰) 등 재건 달성친목회 구성원들을 만나 조선의 정세를 전망하였다. 서상환은 고향인 통영에서 5~6만 원 상당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고 통영의 부호 서상호(徐相灝)와 협의하였다. 또한 고향에서 동지 규합을 위하여 활동하였으나, 1919년 5월 무렵 정진영의 밀고로 서상환을 비롯한 재건 달성친목회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서상환은 9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구류 처분을 받았고, 1920년 3월 22일 대구고등법원에서 면소 판결로 석방되었다. 서상환은 1934년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여 법조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청 경상남도 고문을 맡았으며, 경상남도 내무국장을 지냈다. 1949년 3월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으로 있을 때 부산을 방문하여 선거 부정에 대하여 경고하였다. 1950년 6월 22일 검찰총장에 취임하였으며, 1952년 3월 5일부터 1954년 6월 29일까지 제6대 법무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서상환은 1968년 5월 25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환의 공적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법조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의 피해자 서정철(徐廷哲, 1921. 5. 13 ~ 1959. 2. 18.) 준장과 서정화(1933) 전 내무부 장관 형제는 그의 종손자(從孫子)이며, 서정귀 전 국회의원은 그의 재종손(再從孫)이다. 서상호 전 국회의원은 그의 4촌 형이다.
독립유공자 박중한은 그의 손아랫처남이다
서상환은 1888년 9월 24일 경상도 고성현 춘원면 대곡리(현 경상남도 통영시 항남동)에서 아버지 서인순(徐璘淳, 1835. 4. 17 ~ 1899. 11. 12)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아버지 서인순은 1883년 선공감 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종9품)을 역임했다.
이후 용남군 동면 서부동(현 통영시 문화동)으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16세까지 집에서 한문을 수학했으며, 1918년 7월 일본 니혼대학 전문부 법률과를 졸업했다.
그는 통영군 지역의 혁신 유림으로, 1915년 음력 1월 15일 윤상태(尹相泰), 서상일 등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안일암에서 시회(詩會)를 가장하여 비밀결사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를 조직했고,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수행했다. 그러나 곧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된 뒤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해 3월 17일 박종환(朴鍾煥)의 집에서 김영중(金永仲), 유금룡(兪今龍), 공상로(孔庠魯), 김시조(金時朝), 이종준(李鍾俊)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 경남 일대에서 동지 규합에 힘쓰다가 또다시 체포되었다. 그해 9월 29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고등법원에 이송되었다. 그 뒤 고초를 겪다가 상고 끝에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에 대해 면소로 방면되었다.
1925년 고향 통영군에서 허기엽(許基燁)과 박종한, 박종환, 김영중 등과 함께 남선해산물주식회사(南鮮海産物株式會社)를 경영하는 데에 참여하기도 했다.
1927년 3월, 경상남도 도평의원(道評議員) 김기정(金淇正)이 도평의회 석상에서 조선인 교육이 불필요하며 조선어의 통역을 철폐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박봉삼 등 10여 명이 김기정 징토시민대회를 개최했다가 김기정의 고소로 그해 5월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에 분노한 황덕윤, 황봉석(黃奉石), 이태원(李泰源) 등 35명의 인사들은 5월 10일 모임을 갖고 구금 인사들에 대한 금전 모집, 변호사 선임, 석방운동을 위한 시민대회 개최를 계획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이 이를 막자, 황덕윤, 황봉석 등은 5월 13일에 다시 구금인사들의 석방과 동포들의 호응을 촉구하는 격문 5백매를 인쇄해 시내 각처에 배포했다.
서상환은 여기에 호응해 시위에 가담했고, 수천 명의 군중이 김기정의 집을 습격, 파괴하고 구속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일 때 선두에서 앞장섰다. 그러다가 일제 경찰에게 또다시 체포된 그는 1927년 6월 5일 마산지방법원 충무지청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마산지방법원 검사국에 이송되었다.
그 뒤 1년 반 동안 고초를 겪다가 1928년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혐의로 징역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90일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같은 달 20일 상고가 취하되어 곧 출옥하였다.
1934년 일본 변호사시험에 합격하고 귀국 후 1936년 1월 21일 부산지방법원 검사국에서 변호사 명부 등록을 거쳐 개인 변호사 사무소를 개업했다.
8.15 광복 후 미군정기에 경상남도 군정청 고문, 경상남도 내무국장 등을 역임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을 역임했고, 1950년 6월부터 1952년 3월까지 대검찰청 검찰총장을 역임했다. 검찰총장 재임 시절, 1951년 1월 1,901명에 대해 특별사면, 1,259명에 대해 특별감형을 실시했으며, 1951년 7월 19일 국내재산 도피방지법 시행령을 제정하고, 1951년 9월 8일 국가배상법을 제정하는 데에 일조했다.
1952년 3월부터 1954년 6월까지 제6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상남도 부산시 서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당 김영삼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8년 5월 25일 부산시 남부민동(현 부산광역시 서구 남부민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서상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후손
부인 밀양 박씨(1890 ~ 1965. 4. 11) 박순일(朴順日)의 딸과 혼인하여 슬하에 외아들 서병태(徐丙太, 1908. 6. 9 ~ 1928. 3. 9)를 두었으나, 서병태는 결혼도 하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후 조카 서병두(徐炳斗, 1899. 8. 10 ~ 1961. 2. 9)의 막내 아들인 서정신을 봉사손으로 입양했다. 손자 혁산(赫山) 서정신(徐廷信, 1940. 8. 8 ~ 2016. 3. 14)은 부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1961년 제13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법무부차관, 대검찰청 차장검사,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등을 역임했다. 장증손자 서창민(徐昌民, 1968. 2. 15 ~ )은 서강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1993년 SBS 아나운서 공채 3기로 합격하여 활동했다.
가족
- 할아버지 : 서기보(徐麒輔) 첨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가족 관계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대부.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徐閈)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