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조(조선)
서경조(徐敬祖 목사(牧使))
가족 관계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서존(徐存 태원군(太原君). 병부상서(兵曹尙書).장관)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부여융)의 원손으로 이천 서씨(利川徐氏) 아간공 (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의 5세 후손인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부여 서씨 일가 소장 자료(扶餘 徐氏 一家 所藏 資料)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관련항목 보기 부여 서씨 일가에서 소장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고전적 및 고문서. [개설] 부여 서씨 일가 소장 자료의 소장자는 부여 서씨 29세손이자 정의공파(貞毅公派) 12세 종손인 서형관(徐炯寬)으로, 현재 고전적 8건, 고문서 38건 등을 소장하고 있다. 부여 서씨 17세손으로 정의공파의 파조(派祖)였던 육곡(六谷) 서필원(徐必遠)[1614~1671]과 그의 아들 서경조(徐敬祖)에 관련된 자료가 대부분이다. 서필원은 17세기 중후반에 중앙과 지방에서 요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집권 세력인 서인(西人) 계열 내에서도 국왕 중심의 정치를 추구한 김육(金堉)의 한당(漢黨)에 속했다. 사림 중심의 정치를 추구한 송시열(宋時烈) 계의 산당(山黨)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으며, 소론(少論)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일 ‘정의(貞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부여 서씨 문중은 이러한 서필원의 공로를 인정해 정의공파라는 별도의 파(派)를 만들었다. [구성/내용] 부여 서씨 일가 소장 자료 중 고전적은 9건으로, 『육곡선생유고(六谷先生遺稿)』, 『인척가세계초(姻戚家世系抄)』, 『천녕유씨세계(川寧兪氏世系)』, 『가기(家忌)』, 『평성삼십소(平聲三十韶)』, 『난파(欄波)』, 『경홍신법(景洪神法)』, 행장(行狀)서필원, 무명책 등이다. 『육곡선생유고』는 서필원의 글들을 모아 만든 유고(遺稿)[문집의 한 종류]이고, 『인척가세계초』는 정의공파 문중의 혼인 관계를 정리한 것이다. 후자는 서필원의 직계 조상 및 후손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상대 집안의 가계를 족보 형식으로 정리한 책으로, 부여 서씨 정의공파 후손들에게 가문의 내력과 인척 관계를 가르쳐 자기 가문에 대한 자긍심과 문중 및 선조에 대한 존경심을 높일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한편 고문서는 38건으로, 문서 종류별로 보면, 백패(白牌)[소과 합격증]·홍패(紅牌)[대과 합격증] 2건, 교지(敎旨)[관리 임명장] 36건이다. 인물별로, 서필원 관련 문서 18건, 서운기(徐雲驥)[서필원의 아버지] 관련 문서 3건, 서경조 관련 문서 16건, 서정덕(徐定德)[서필원의 손자] 관련 문서가 1건 등이다. 서필원의 교지[1635~1669]를 보면, 서필원이 문과 급제 이후 병조 참의, 승정원 좌승지,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조 참의, 형조 참의, 사헌부 대사헌, 함경도 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사간원 대사간, 호조 참의, 황해도 관찰사, 형조판서, 중추 부사(中樞副使) 등 중앙과 지방의 요직을 두루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후손은 여러 개의 선대 필적(筆跡)을 소장하고 있다.
부여 서씨 일가 소장 자료는 양주에 세거하던 부여 서씨 가문이 중앙 정계의 요직을 두루 거친 서필원을 기점으로 근기(近畿)의 유력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고, 정치적 성장, 혈연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선 후기 경기 북부 지역의 대표적인 사족 가문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