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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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 = 연산 서씨 (連山 徐氏)

관향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시조 = 서준영(徐俊英)

중시조 = 서의민(徐義敏)

집성촌 = 충청남도 홍성군
충청남도 서산시

년도 = 2015

인물 = 서해조, 서병덕, 서기철, 서철모

인구 = 7,510명

순위 =

비고 =

연산 서씨(連山 徐氏)는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역사

이천서씨(利川徐氏)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 11세손인 시조 서준영(徐俊英)의 아들 서보(徐寶)가 있었으나 이후 문헌이 없어서 조선조에서 참군(參軍)을 지낸 서의민(徐義敏)을 1세조로 한다. 2세손 서종수(徐宗秀)가 현감(縣監)을 지냈고, 서종수의 아들 서련(徐憐)이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역임하였다. 서련의 아들 서천령(徐千齡)은 1546년(명종 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청습(徐淸習 정2품 판전의시사)
        • 고고조할아버지: 서효리(徐孝理 정2품 좌복야)
          • 고조아버지:서찬(徐贊 종2품 정당문학)
            • 증조아버지: 서희팔(徐希八 종2품 정당문학)
              • 큰할아버지: 서춘(徐椿 정2품 판내부사사)
              • 큰할아버지: 서능(서릉)(徐稜 종1품 문하시중)
              • 큰할아버지: 서박(徐樸 봉례공)
              • 큰할아버지: 서적(徐迪남양군)
              • 할아버지: 서직(徐稷 연성군)
                • 아버지: 서준영(徐俊英 연성군)
                  • 본인: 서보(徐寶 정3품 공조전서)
  • 작은고고고고고조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서씨일가연합회 [[1]] [[2]]

본관

연산(連山)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일대의 옛 지명이다. 백제의 황등야군(黃等也郡)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년)에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고, 940년(고려 태조 23년)에 연산군(連山郡)으로 고쳤으며, 1413년(조선 태종 13년)에 연산현이 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충청도 연산현의 토성(土姓)으로 (宋)·서(徐)·손(孫)·고(高) 4성이 기록되어 있다.[1] 1914년 연산면 등 5개 면으로 나누어 논산군에 통합되었고, 1996년 논산시로 승격되었다.

인물

서련(徐憐) 판관은 김녕사굴(金寧蛇窟) 일화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제주도와 연관된 서씨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입도조 서희례(徐希禮)보다 4대를 앞서는 인물이다.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19세 손이며 연산(連山)을 관(貫)으로 한 연성군(連城君) 서준영(徐俊英)으로부터는 5세손이 된다.

  • 서해조(徐海朝, 1689년 ~ 1770년) : 9세손. 증조부는 서효적(徐孝積), 조부는 서필행(徐必行), 아버지는 서욱이다. 자는 종지(宗之), 호는 구구재(九九齋). 1714년(숙종 40) 생원이 되고, 1735년 장릉참봉(章陵參奉)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37년 자여찰방(自如察訪), 목릉별검(穆陵別檢)을 거쳐 1742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하였다. 1745년 예조·병조좌랑과 병조정랑을 거쳐, 연풍현감으로 나가 빈번한 사행(使行)으로 인한 민폐를 덜어주었다. 1751년에 사헌부지평에 이어 이조정랑이 되었으며, 1763년 병조참의, 1770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 서병덕(徐秉德, 1712년 ~ ) : 10세손. 자는 유호(攸好), 호는 주은(酒隱). 충청도 예산군 광시면 출신. 1750년(영조 26)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751년(영조 27) 문과에 급제하여 장령(掌令)‧헌납(獻納) 등을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1811년(순조 11) 궤장(免杖)을 하사받았다. 시호는 정익(靖翼)이다.
  • 서기환(徐基煥, 1849년 ~ 1906년) :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일으켜 1906년 홍주성 전투에 참가했다가 순절했다.
  • 서승태(徐承台) : 한말 독립운동가
  • 서덕모(徐德模, 1954년 ~ ) : 제10대 충청북도 정무부지사
  • 서용칠(徐容七, 1954년 ~ ) : 연세대학교 환경공학부 교수
  • 서기철(徐基哲, 1962년 ~ ) : KBS 아나운서
  • 서철모(徐喆模, 1968년 ~ ) : 경기도 화성시장

항렬자

14세 15세 16세 17세 18세 19세 20세 21세 22세 23세 24세 25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基(기) 錫(석) 承(승) 模(모) 容(용) 喆(철) 鐘(종) 源(원)
洙(수)
寅(인)
相(상)
燮(섭)
烈(열)
廷(정)
圭(규)
鎭(진)
鎬(호)
泳(영)
泰(태)
穆(목)
根(근)
然(연)
熙(희)
坤(곤)
均(균)
鉉(현)
鏞(용)

집성촌

문화재


서승태(徐承台)

박원식 등 주도 광천시장서 독립만세운동 서승태 1908년 덕명학교 설립 후진 양성

광천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7일 홍성읍 장터에서 군중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위를 전개한 것으로 시작, 3월 6일 광천리 박원식의 집에서 이명종이 박세화로부터 경성의 독립에 대한 상황과 조선독립을 주창하는 뜻을 기재한 선언서를 보고 박원식과 함께 행동할 것을 협의했다.

3월 8일에 박원식과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취지의 선언서를 종이에 써서 광천시장과 옹암리 두 곳에 게시해 지역 주민의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그러나 관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다수의 독립선언서를 각 가정에 배부할 것과 광천시장 장날을 이용해 시장에 모인 군중들을 선동해 독립만세운동을 하기로 했다. 이후 잡화상을 경영하던 최응모, 제화점을 운영하던 오인섭, 농사일에 종사하던 성배호 등에게 이 계획을 상세히 전해 찬동을 얻었다. 이후 3월 16일에 서승태를 찾아가 선언서의 내용을 요약해줄 것을 부탁했다.

3월 18일 오인섭의 집에서 박세화, 이명종, 최응모, 오인섭 등이 선언서 510매를 복사해 이면종과 성배호 등은 이날 밤 독립선언서를 광천리와 옹암리 각 가정에 배포했다. 이 사건으로 이명종, 최응모, 오인섭, 성배호, 서승태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고 경성복심법원에서 이명종은 징역 1년6월, 최응모와 성배호는 징역 1년, 오인섭은 징역 10월, 서승태는 징역 8월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어 3월 21일에는 광천시장과 은하면 대천리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

서승태의 자는 성삼(聖三), 호는 일농(逸農)이다. 연산서씨 출신으로 연산 5세조인 서련 제주판관의 13세손으로 1854년 광천읍 상정리에서 태어났다. 1906년 민종식 의병장이 의병을 이끌고 남포 방면에서 홍주성을 향해 행군하는 것을 보고 당시 지방의 부호였던 박모의 창고를 허락도 없이 열어 창고 안 곡식을 군량미로 제공했다. 1908년부터 공립 홍주보통학교의 학무위원을 역임하면서 교육활동에 투신했고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만회하는 길은 신문화를 배우는 것이라 생각해 1908년 상정리에 덕명학교를 설립해 후진 양성에 힘썼다.

서승태의 교육열이 알려지면서 당시 기호홍학회 홍성지부에 의해 본 학회로 보고되면서 황성신문 1909년 3월 9일자에 소개되기도 했다. 1910년 7월에 있었던 제1회 졸업식에는 서홍모를 비롯해 8명이 졸업했다. 그러나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놓이자 박창병, 서태석, 방철용, 이희홍과 졸업생 8명은 학부형회를 조직해 운영이 연장되고 6회까지 졸업생을 배출했다. 유능한 인재양성을 추구했던 덕명학교는 민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이후 광천읍 신진리에 광천보통학교가 일본인에 의해 세워지면서 덕명학교는 폐교됐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광천보통학교는 덕명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일농 선생의 뜻을 후세에 알리고자 홍학기념비를 세웠다. 1992년 국가유공자로 선정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박형목 연구원은 ‘한말 홍성지역 근대교육운동의 성격’에서 “을사늑약 이후 자강단체 지회도 조직됐는데 대표적인 단체가 번천면국채보상기성회와 기호홍학회 홍성지회로 국채보상운동과 사립학교 설립운동이 이 단체에 의해 주도됐다”며 “기호홍학회 지회원들의 3면1교제에 입각한 의무교육 시행을 계획한 이들의 노력으로 홍성지역 근대교육운동이 사실상 추진됐다”고 설명했다.

1914년 덕명학교 나무명패로 1914년 홍주에서 홍성으로 개명될 당시 만든 것으로 1915년 덕명공립보통학교로 통합 전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왼쪽) 황성신문 1909년 3월 9일자 신문에 기록된 덕명보명. 충남 홍주군 궁경면(현 광천) 덕명학교는 서승태 씨가 독립설립해서 열심히 유치하는 중 박창병, 이충호, 서태석, 김병욱 등 여러 명이 찬성해 뜻을 함께했고 의연금을 내는 자가 많아 나날이 학생들이 증가하니 호서의 모범으로 만들고자 한다는 내용이다.(사진 오른쪽) 을사늑약 직후까지 사립학교 설립은 전무했는데 1907년을 정점으로 변화됐다. 1908~1909년은 교육운동의 전성기로 대표적 교육기관이 홍명학교, 호명학교, 덕명학교, 광명학교 등이다. 이 학교들은 단순한 사립학교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지역단위 근대교육을 가늠하는 바로미터였다.

기호홍학회는 기호지역 출신 인사들이 모여 1908년 1월에 창립됐다. 본부는 서울에 중앙회를 둔 반면 지방에는 지회를 설치해 계몽운동을 확산시키려 노력했다. 1909년 1월 16일 인가된 홍성지회 지회장은 서병태, 부회장은 김시원, 총무는 서승태, 평의원은 김교홍 외 10명이다.

박 연구원은 “일농 서승태는 내포지역을 대표하는 인물군에 속하며 3·1운동에는 직접 참여·지도하는 등 실천가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며 “그러나 기초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해 일농의 삶과 민족운동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에는 역부족이어서 향후 일농과 함께 활동한 인물들에 대한 연구는 홍성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데 필수적 요인이다”고 강조했다.

한편 군에서는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행사로 ‘1919 그날의 함성’을 추진한다. 이를 위해 홍성지역 3·1운동유족회와 보훈단체를 비롯해 각 기관과 사회봉사단체, 문화예술단체 등이 참여하는 준비위원회를 발족한다. 또한 만해생가 및 문학체험관에 만해와 3·1운동 100주년을 주제로 교육프로그램, 전시 계획, 기미독립선언 시비제작 등이 예정돼 있다. 이밖에도 ‘만해 한용운 선생과 백야 김좌진 장군’, ‘금마·홍동·장곡·광천의 31운동’, ‘호서유림의 파리장서 운동 100주년’ 등 다양한 학술세미나가 열린다.

같이 보기

  • 세종실록 149권, 지리지 충청도 공주목 연산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