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조선)
조선 중기 문신. 대사성을 역임하셨다.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수상)-서필(徐弼 내의령 수상)-서희(徐熙 내사령 수상)-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정 3품 장관급)- 서면(徐冕 주부 -정 4품 차관보급 ) -서린(徐嶙) (판대부사 -정 2품 부수상) - 서찬(徐瓚 (장령) -서인(徐諲 교수(학자)- 서욱(徐勖 승지) -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 종 2품.부수상) -서진(徐晋 감정)- 서혼(徐混 우승지) -서강(徐岡 대사성)-서산보(徐山甫 장령) 으로 후손이 이어진다.
고려시대 권문세족은 이천 서씨,인주 이씨,해주 최씨,남양 홍씨가 4대 문벌귀족이다. 조선시대에는 이천서씨에서 분파한 대구 서씨(大丘徐氏) 서성(徐渻 증 영의정) 후손이 3대 정승(서종태(徐宗泰 영의정),서명균(徐命均 좌의정),서지수(徐志修 영의정)),3대 대제학(서유신(徐有臣 대제학),서영보(徐榮輔 대제학),서기순(徐箕淳 대제학))을 최초로 6대 연속과 서명응(徐命膺 대제학),서호수(徐浩修 직제학), 서유구 (徐有榘 대제학) 3대 대학자를 연속 배출하여 조선에서는 서지약봉(徐之藥峰)이요.홍지모당(洪之慕堂) 으로 유명했고, 연리광김(延李光金)와 더불어 대구 서씨,풍산 홍씨,연안 이씨,광산 김씨가 조선 최고 4대 양반 가문으로 꼽힌다. 숙종때 이런 일화가 전한다.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비롯한 서씨 성을 가진 참판급 이상 중신이 30여명 이었다. 어느날 조회를 소집한 숙종이 용상에서 가만히 내려다보니, 오가는 대신들이 대부분 서씨들이라, “마치 어미 쥐가 새끼쥐를 거느리고 다니는 듯 하다!” 라고 말해 주변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숙종의 말씀이었으나, 영의정 서종태(徐宗泰)를 어미쥐로 빗대 그 아래 웅성거리는 서씨대신들의 융성함을 나타내는 기막힌 표현이였다.대구 서씨는 달성 서씨라고도 부른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화순 성산사
1579년경 이천서씨 서의립(徐義立1547~1631)이 화순현 소곡마을에서 거주하다가 입향한 고촌이다.
1907년 건립했던 강당 충의당(忠義堂)과 독특한 형태의 사당 성산사(星山祠)가 외삼문, 충의당 뒤로하고 자리하고 있다. 핑게 없는 무덤 없듯이 사연없는 목조물은 없다.
이곳에는 고려말 절인이었던 여와(麗窩) 서견(徐甄)과 송담(松潭) 서강(徐岡)을 향사하고 있다. 규모는 정 3칸, 측1칸, 맞배, T자형으로 구성됐다. 충의사는 정면 4칸에 측면 2칸이다, 높이가 낮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으며 내부에는 대청형으로 위패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 배향된 여와(麗窩)또는 죽송오(竹松塢) [[서견].(徐甄)은 1391년(공양왕 3)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간관이던 김진양 .이확 등과 함께 조준. 정도전. 남은을 탄핵했으나 그 해에 정몽주가 살해되고 이성계와 조준·정도전 등이 실권을 장악하자 간관(諫官) 김진양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가 조선개국 후 풀려나 은거했다. 은거하면서 지은시가 절인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암반(巖畔) 설중고죽(雪中 孤竹)이야 반갑기도 반가왜라. 묻노라 고죽군(孤竹君)이 네 어떠하던인다. 수양산(首陽山) 만고청풍(萬古淸風)에 이제(夷齊)를 본 듯 하여라.
즉 바위 언저리에, 쌓인 눈을 제치고 서 있는 외로운 대나무야 너를 보니 몹시도 반갑구나! 물어 보거니와, 백이 숙제의 부친인 고죽군을 네가 보기엔 어떠하더냐? 너로 인하여 그 옛날 수양산에 숨어서, 끝내 맑은 절개를 지킴으로 만고에 이름을 빛낸 백이와 숙제 형제를 새삼 보는 것 같도다.
그는 이들에 의해 고려가 멸망하자 그은 금천에 숨어 지내면서 앉을 적엔 북쪽을 향하지 않았고, 일생을 마칠 때까지 한양의 성곽을 대면하지 않으며 절의를 나타냈으며 이때 고려가 망한 일을 분개하며 지었다는 술회(述懷)라는 제목의 시가 널리 읽혀지고 있다.
천년이나 되는 성스러운 도업지를 바라볼수 없네/충성되고 어진이들 밝은 임금을 도왔건만 삼국을 통일하신 왕건 태조의 공은 어디 가고/전 왕조(고려)의 역사 길지 못한 것이 한스럽네. 千載神都隔漢江 忠良濟濟佐明王 統三爲一功安在 却恨前朝業不長
고려의 신하로서 망해 버린 왕조를 그리워 하는 시인의 정서가 잘나타난 이 시는 새 왕조의 조선 태종에게는 반역에 해당되어 조정에서 중신들이 벌하기를 청하였으나 태종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서견은 고려의 신하로서 자신이 섬기던 임금을 잊지 않으니 또한 백이·숙제와 같은 인물이다”라고 하고 그를 국문하지 말고 관리로 임명라고 명했다.
이후 청백리(淸白吏)로 뽑고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오르지 않고 관악산 최고봉으로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절벽이 솟아 있는데,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약간의 석축을 쌓아 올린 곳에 연주대에서 고려의 충신인 강득룡(康得龍)·남을진(南乙珍) 등의 유신(遺臣)들과 이곳에서 멀리 송경(松京:개경) 쪽을 바라보며 두문동(杜門洞)에서 순국한 72인의 충신열사와 망국 고려를 연모하며 생을 마감한다.
그는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선조 때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원천석(元天錫)․범세동(范世東)․탁신(卓愼) 등과 문답하여 동방사문연원록(東方斯文淵源錄)을 저술하고, 화해사전(華海師全)을 편집했다.
충의당 건너에는 1896년 류인석과 함께 충북 제천, 충주에서 일군(日軍)과 전투하여 승리, 원주 장산에서 패한후 중국으로 망명 순국한 서상룡(徐相龍, 1862生~1944)을 위한 정자 삼산정(三山亭)이 1946년에 지었던 것을 최근에 복원해 자리하고 있다.
협곡으로 된 일대에는 호계(虎溪)가 흐르고 있으며 이곳의 경치와 마을 입구에 지석강이 흐르고 있어 이에 '호계(虎溪)에 성한 수풀'이라는 시가 전하고 있다.
높은산 깊은 골짜기에 붉은안개 엉킨 마을이요/옛나무 긴숲에 푸른빛이 잠긴 물가로다 좋은새 날로 찾아와 자주 벗을 부르고/깊은 그늘은 세월과 더불어 함께 옮기구나 高山深壑蒼烟里 古樹長林綠水涯 好鳥日來能喚友 繁陰歲月與之偕
== 삼산정(三山亭) == 신성리 호동마을에 있다. 단층 팔작지붕 골기와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자다. 구한말 의병 나은 서상룡(蘿隱 徐相龍)의 듯을 기리기위해 마을 안쪽 그의 묘지 앞 개울가에 세워진 정자다.
그는 우국지사 기우만(奇宇萬)의 제자로서 1896년에 은마 은암 류인석(毅菴 柳麟錫)의 의병대에 가담하여 춘천에서 항일운동을 활동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하여 정자를 짓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아들 서내준(徐內駿)이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1946년에 지었다가 훼손되고 다시 최근에 재건했다. 정자 앞에는 성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그는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스승인 기우만과 서상룡선생을 기리는 시가 정자내 현판에 거액되어 있다.
三山으로 이름하여 덕봉뒤에 세었으니/ 竹栢이 서로 엉켜 열길이나 높았도다
두곳에 齋와 亭은 함께 義를 지켰고/ 松沙 柳翁 兩先生께 전심을 받았도다. 기특한 飛鳳은 하늘높이 솟구쳤고/ 활발한 寒泉은 머름밖에 깊도다 오랜 사업 이제 모두 이뤘으니/ 어진 소문 맑은 소리 백세토록 전하니